문학관련1798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시집 《또 다른 별에서》(198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박수근 그림의 이미지와 화법이 지닌 특성을 시적인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 2020. 5. 7. 사월(四月) / 김현승 사월(四月) - 김현승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尖塔)*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 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 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 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水仙)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 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2020. 5. 7. 강우(降雨) / 김춘수 강우(降雨)-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뼘 두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 시집 《거울 속의 천사》(2001) 수록 ◎시어 풀이*넙치지지미 : 넙치를 밀가루에 묻혀서 기름에 튀긴 음식.*담괴 : 담(痰)이 살가죽 속에 뭉쳐서 생긴 멍울. ▲이.. 2020. 5. 7. 능금 / 김춘수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능금’이.. 2020. 5. 7.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사진 :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 편지>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2020. 5. 6. 만월(滿月) / 김초혜 만월(滿月) - 김초혜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 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 - 시집 《그리운 집》(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달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서도/ 한 마음으로 달이 뜬다’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달’은 화자로 하여금 그대를 떠올리리게 해 주는 시적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라고 시상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흔히 통속(通俗)에 머무를 수 있는 사실을 품격 있.. 2020. 5. 6. 어머니 / 김초혜 어머니 - 김초혜 1.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 시집 《어머니》(198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이 본래 한 몸이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어의 적절한 생략을 통해 간결미를 구현하고, 어머니와 자식의 대조적인 모습을 병치하여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어머니와 자식은 ‘한 몸’이었으나 ‘서로 갈려/ 다른 몸이 되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한 몸이었다가 서로 갈려 ‘주.. 2020. 5. 6.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꽃이 피는 과정을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꽃대가 흔들리고 중심에서 벗어나야 꽃이 핀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명에의 추구를 형상화하였다. 화자는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본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인 꽃대는 흔들린다. 꽃이 피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중심에 서 있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심을 지키고.. 2020. 5. 6. 무화과 / 김지하 무화과 -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우러른 잿빛 하늘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어떤가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이것 봐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비틀거리며 걷는다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개굴창을 가로지른다 - 시집 《애린》(1986) 수록 ◎시어 풀이*도둑괭이 : 도둑고양이./ 무화과 : 뽕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3m, 열매는 어두운 자주색 / 개굴창: ‘개골창’의 강원도 방언.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이해와 감상이 작품은‘무화과’의 생태에서 인간의 내적 가치를 발견하고.. 2020. 5. 5. 오적(五賊) / 김지하 오적(五賊) - 김지하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흗날 백두산 아래 나라 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 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2020. 5. 5. 서울 길 / 김지하 서울 길 - 김지하 간다 울지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 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 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갈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야만 했던 농촌 젊은이들의 비애를 노래한 작.. 2020. 5. 5. 강강술래 / 김준태 강강술래 - 김준태 추석날 천릿길 고향에 내려가 너무 늙어 앞도 잘 보지 못하는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드린다. 어느덧 산국화 냄새 나는 팔순 할머니 팔십 평생 행여 풀여치 하나 밟을세라 안절부절 허리 굽혀 살아오신 할머니 추석날 천릿길 고향에 내려가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주면서 언제나 변함없는 대밭을 바라본다.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그렇게 소중히 가꾸신 대밭 대밭이 죽으면 집안과 나라가 망한다고 가는 해마다 거름 주고 오는 해마다 거름 주며 죽순 하나 뽑지 못하게 하시던 할아버님 할아버님의 흰 옷자락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 도깨비들이 춤추던 대밭을 바라본다. 너무 늙어 앞도 잘 보지 못하는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주면서 강강술래 나는 논이 되고 싶었다 강강술래 나는 밭이 되고 싶었다. -.. 2020. 5. 4.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사진 : 시인이 시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 2020. 5. 4. 장편(掌篇) 2 / 김종삼 장편(掌篇) 2 - 김종삼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 10전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시집 《시인학교》(1977) 수록 ◎시어 풀이장편(掌篇) : 콩트. 매우 짧은 산문, 즉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품이라는 뜻./ 균일상(均一床) : 똑같은 가격의 밥상 ▲이해와 감상 시인 김종삼은 6.25 전쟁 뒤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주목 받았다. 그의 시는 ‘여백의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라고도 말한다. 시의 기법을 통해 비어 있는 세계를 깨닫고 독특한 미의 창조를 시도한 그의 노력은 1977년에 발표된 시인학교>에 수록된 ‘.. 2020. 5. 4. 술래잡기 / 김종삼 술래잡기 - 김종삼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술래잡기였다.꿈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술래가 되었다.얼마 후 심청은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한동안 서 있었다.술래잡기하던 애들은 안 됐다는 듯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 《김종삼전집》 (198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전 소설 심청전> 속의 인물인 ‘심청’과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는 모습을 통해 심 봉사와 심청의 한(恨)과 슬픔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노래한 작품이다. 심청전>에서 유추된 상상력으로 술래잡기라는 놀이를 통해 심청이의 한(恨)과 슬픔을 형상화한 시이다. 고전 소설 심청전> 속의 심청이는 숙명적으로 한과 슬픔이 많은 소녀이다. 엄마 없이 성장하고 눈 멈 아버지와.. 2020. 5. 4. 묵화(墨畫) / 김종삼 묵화(墨畫) -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시집 《십이음계》(1969) 수록 ◎시어 풀이 *묵화(墨畫) : 먹으로 그린 동양화. 먹그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대상의 세밀한 부분을 생략하고 단 하나의 장면만으로 구성하여 제목처럼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하게 하는 시로, 할머니와 소를 제재로 하여 할머니의 쓸쓸하고 힘겨운 삶과 소와의 유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한 편의 ‘묵화(墨畵)’처럼 할머니와 소의 모습을 짧은 시행에 절제된 언어 표현하여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고, 쉼표로 마무리되어 앞으로도 이러한 삶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할머니‘와 ’소‘의 관계는 단순히 가축이 아.. 2020. 5. 4. 고고(孤高) / 김종길 고고(孤高) - 김종길 북한산이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밤사이 눈이 내린,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가볍게 눈을 쓰고왼 산은 차가운 수묵(水墨)으로 젖어 있는,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신록이나 단풍,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기다려야만 한다. - 시집 《하회에서》 (1977) 수록 ◎시어 풀이*수묵(水墨) : 이 엷은 먹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고한 삶의 자세와 정신세계에 대한 지향(의지)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 2020. 5. 4. 밤나무들의 소망 / 김윤배 밤나무들의 소망 -김윤배 다 절딴낭규 지난번 바람에두 많이 상했는디 이번에는 아주 절딴나구 말었슈 왼케 바람이 쎄니께 말두 못해유 그럼유 다 쏟아지구 말었슈 퍼렇게 쏟아진 풋밤송이를 보구 있을라문 억장이 무너져유 온 산이 퍼렁규 가쟁이두 모두 찢어지구유 뿌리째 뽑힌 낭구도 수월찮유 지난 해에두 밤농사는 거의 망했었슈 올해는 좀 괜찮을라나 했쥬 그런디 그 오살을 할 놈의 태풍 십사홍가 멍가 하는, 하기사 삿짜 들어가서 안 죽을 눔 없능규 서울 사는 말이유, 아이구 말두 말어유 월급쟁이 갈급쟁이라구 지살기두 빠듯해유 멀 도와유 내가 밤 내서 돈좀 올려보내 줄라구 그랜는디 이 모양이 됐으니 갸두 큰 일이쥬 손자녀석 가에비래두 보탤라구 했는디 에릴적 부텀 꼬부랑 말하구 꼼푸터하고 가르쳐야 한다구 즈 에미가.. 2020. 5. 3. 김광섭 시인에게 / 김광섭 김광섭 시인에게 - 김유선 60년대 초 당신이 살던 성북동에서는비둘기들이 채석장으로 쫓겨 돌부리를 쪼았다지만20여 년이 지난 지금성북동에 비둘기는 없는 걸요.채석장도 없어요.요즈음은 비둘기를 보려면도심으로 들어와 시청 광장쯤에서 팝콘을 뿌리지요.순식간에 몰려드는 비둘기 떼겁 없이 손등까지 올라와만져도 도망가지 않고소리쳐도 그냥 얌전히 팝콘을 먹지만나머지 부스러기 하나 마저 먹으면올 때처럼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는비둘기를 만날 수 있어요. 그때에는눈으로 손으로 애원해도다시 오지 않아 - 《별이라고 했니 운명이라고 했니》(199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시청 광장의 비둘기를 통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인의 이기적인 모습을.. 2020. 5. 3. 그대 생의 솔숲에서 / 김용택 그대 생의 솔숲에서- 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찬서리 내린 실기지 끝에서 눈뜨리여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게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 시집 《그 여자네 집》(1998) 수록 ◎시어 풀이상수리나무 : 참나뭇과의 낙엽 교목. 둥근 .. 2020. 5. 2. 섬진강15 / 김용택 섬진강15 –겨울, 사랑의 편지 -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 따뜻한.. 2020. 5. 2. 섬진강 3 / 김용택 섬진강 3 - 김용택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드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ㅡ 시집 《섬.. 2020. 5. 2. 섬진강 1 / 김용택 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들,숯불 같은 자운영꽃*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 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을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노을 띤 무등산이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 2020. 5. 2. 연 2 / 김영랑 연 2 - 김영랑 좀평나무 높은 가지 끝에 얽힌 다아 해진 흰 실낱을 남은 몰라도 보름 전에 산을 넘어 멀리 가 버린 내 연의 한 알 남긴 설움의 첫 씨. 태어난 뒤 처음 높이 띄운 보람 맛본 보람 안 끊어졌다면 그럴 수 없지. 찬바람 쐬며 콧물 흘리며 그 겨우내 그 실낱 치어다보러 다녔으리. 내 인생이란 그때부터 벌써 시든 상싶어 철든 어른을 뽐내다가도 그 실낱같은 병의 실마리 마음 어느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어 얼씬거리면 아이고! 모르지. 불다 자는 바람 타다 버린 불똥 아! 인생도 겨레도 다아 멀어지더구나. - 《영랑 시선》(193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연날리기와 유년의 꿈 꾸기를 대응시켜 날아가 버린 ‘연’에 빗대어 인생의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연’은 화자는 .. 2020. 5. 1. 북 / 김영랑 북 -김영랑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 2020. 4. 30. 거문고 / 김영랑 거문고 - 김영랑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饗宴)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 《조광》(193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영랑의 작품 중에서 현실 인식이 비교적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소리를 마음껏 내면서 울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대 선 거문고를 통해,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살아가는 화자의 답답함과 비애 어린.. 2020. 4. 30.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문장》(1939) 수록 ◎시어.. 2020. 4. 29. 오월(五月) / 김영랑 오월(五月) -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러울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 《문장》(1939) 수록 ◎시어 풀이 *이랑 : 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엽태 : 남도의 방언으로, ‘아직’의 뜻.*아양 : 귀염을 받으려고 알랑거리는 언행.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오월에 느낄 수 있는 봄의 생명력을 향토적인 .. 2020. 4. 29. 벌레길 / 김신용 벌레길 - 김신용 산에 올라 산나물을 따다 보니 알겠네. 저 벌레도 사람살이의 길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명아주 수리취 화살나무 훗잎까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벌레도 먹고 있다는 것을 마치 길라잡이처럼 벌레가 먼저 먹고 있다는 것을 그동안 벌레가 먹은 잎은 벌레를 보듯 모두 버렸었다. 된장 속에서 맛있게 익은 깻잎도 벌레 자국이 있는 것은 먹지 않았다. 그러나 보라, 산그늘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이름 모를 잎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벌레가 먼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무슨 징표*처럼, 잠식*과도 같은 자국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산 속 수풀을 헤치며 산나물을 따다 보니 알겠네. 그 이름 모를 풀의 잎에 새겨져 있는 벌레 먹은 자국이 이렇게 사람살이의 지도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지난날 허기에 겨운 보릿.. 2020. 4. 29. 엄마의 발 / 김승희 엄마의 발 - 김승희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 별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 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 꽃 몇 포기를 조화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 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2020. 4. 29.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6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