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1790 국수 / 백석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대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 2020. 6. 4. 고향(故鄕) / 백석 고향(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神仙)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결*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시집 《동방평론》(1932) 수록 ◎시어 풀이 *북관(北關) : ‘함경도’의 .. 2020. 6. 3. 우포늪 왁새 / 배한봉 우포늪 왁새* -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서리꾼*이었다. 신명난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의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매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2020. 6. 2. 북어 / 배우식 북어 - 배우식 사람한테 잡혀가도 입을 크게 벌리고만 있으면 산다고 아버지한테 귀 닳도록 들었습니다. 사람한테 잡혀가도 눈만 크게 부라리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겁먹고 도망간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도망간다고 아버지한테 귀빠지게 들었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 하나 깜박대지 않고 크게 뜨고 있는 내가 무섭지요. 벌벌 떨리지요? -시집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200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북어’를 화자로 내세워 진실과 거짓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북어’를 의인화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허위와 허풍을 북어의 눈을 통해서 해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모두 세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흔.. 2020. 6. 1. 불법체류자들 / 박후기 불법체류자들 - 박후기 소읍* 변두리 처가(妻家) 술 떨어진 밤 술 사러 간다 날벌레들 싸락눈처럼 몰려드는 가로등 밑 공중전화 똑, 똑 전화카드 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똑, 똑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고향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소를 닮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축축한 달빛이 일렁인다 * 플라타너스 오그라든 나뭇잎 몰래 귀 기울이다 철커덕 수화기 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켜*를 놓친 순간 나뭇잎도 지상(地上)의 불법체류자가 되나니, 불법체류자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밤늦도록 사각거린다* -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2009) 수록 ◎시어 풀이 *소읍 : 주민과 산물이 적고 땅이 작은 고을 *그렁그렁한 : 눈에 눈물이 넘칠 듯이 그득 괴어 있는. *일렁이다 : 1. .. 2020. 5. 31. 세한도 / 박신지 세한도(歲寒圖) - 박신지 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허공에 허리 굽은 노송 몇 그루 솔향기보다 짙은 묵향* 어리다 삭정* 바람 말고는 찾아올 손님 있을까 외딴 오두막 하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디까지 마음의 길 닿아 있을까 - 시집 《봄은 쟁기질하며 온다》 (2002) 수록 ◎시어 풀이 *묵향(墨香) : 먹의 향기 *삭정 : 산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죽은 가지. (=삭정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황량함과 고립감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추사의 를 떠올리고, 그림에 묘사된 상황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황량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고귀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작품이다. 이 시의 표현상의 특징은 한 마디로 간결한 형식에 있다. 2연의 짧은 글 속에 제재가 된 그림의 절제미와 여백의 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 2020. 5. 30. 탄생 / 박현수 탄생 - 박현수 먼 길을 걸어 아이가 하나, 우리 집에 왔습니다 건네줄 게 있다는 듯 두 손을 꼭 쥐고 왔습니다 배꼽에는 우주에서 갓 떨어져 나온 탯줄*이 참외 꼭지처럼 달려 있습니다 저 먼 별보다 작은 생명이었다가 충만한 물을 건너 이제 막 뭍에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잔다는 건 그 길이 아주 고단했다는 뜻이겠지요 인류가 지나온 그 아득한 길을 걸어 배냇저고리*를 차려입은 귀한 손님이 한 분, 우리 집에 왔습니다 - 시 전문지 《유심》 (2010) 수록 ◎시어 풀이 *탯줄 : 어머니 몸속에서 아기집과 태아를 이어. 태아가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는 줄 *배냇저고리 : 깃과 섶을 달지 않은, 갓난아이의 옷. ▲이해와 감상 한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힘겹고 고단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이 시에서 화자는 생명 .. 2020. 5. 30. 지구(地球) / 박용하 지구(地球) - 박용하 달 호텔에서 지구를 보면 우편엽서 한 장 같다. 나뭇잎 한 장 같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 별이 아직은 은하계*의 오아시스*인 모양이다. 우주의 샘물인 모양이다. 지구 여관에 깃들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방이 없어 떠나는 새 · 나무 · 파도 · 두꺼비 · 호랑이 · 표범 · 돌고래 · 청개구리 · 콩새 · 사탕단풍나무 · 바람꽃 · 무지개 · 우렁이 · 가재 · 반딧불이…… 많기도 하다. 달 호텔 테라스에서 턱을 괴고 쳐다본 지구는 쓸 수 있는 말만 적을 수 있는 엽서 한 잎 같다. - 시집 《영혼의 북쪽》(1999) 수록 ◎시어 풀이 *은하계(銀河系) : 은하를 이루고 있는 항성을 비롯한 수많은 천체의 집단. 항성 · 성단(星團) ·.. 2020. 5. 29.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 2020. 5. 28. 취나물 / 박성우 취나물 - 박성우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잔뜩 뜯어 오셨어요 머리엔 솔잎이 머리핀처럼 꽂혀 따라와 마루에서야 뽑아졌구요 어머니는 두릅이 죄다 쇠서* 아깝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무심히 떠난 아버지를 중얼거렸는지 몰라요 가족사진에 한참이나 감전되어 있던 어머니가 취나물을 다듬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웬일인지 연속극을 보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어머니는 아버지 냄새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닌지 느그*아부지는……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은 다른 때보다 아주 천천히 다듬어졌어요 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을 별시랍게도* 좋아혔는디, 어머니가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게 취나물은 뭣 하러 뜯어와서 그려요, 그런 어머니가 미워서 나는 방을 나왔어요 사실은 나도 울 뻔했으니까요 그리고 다짐했.. 2020. 5. 28. 아직은 연두 / 박성우 아직은 연두 - 박성우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 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 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 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 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2020. 5. 28. 봄비 / 박목월 봄비 -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草家)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月谷嶺) 삼십 리(三十里)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나려 젖은 담 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는가 슬픈 꿈처럼 ▲이해와 감상 박목월의 초기시에 속하는 이 시는 조용히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하는 애상적(哀想的), 낭만적인 서정시이다. ‘봄비’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깊어지게 하는 동시에 시 전반에 걸쳐 애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3연, 각 4행으로 된 이 시는 시행이 점차적으로 짧아지는 정제된 형태와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봄비가 내리는 정경을 묘사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봄은 흔히 소생(蘇生)의 계절이라 불린다. 이 무렵 대지를 촉촉이 적시.. 2020. 5. 27. 이별가 / 박목월 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 수록 ◎시어 풀이 *뭐락카노 : 경상도 사투리로, ‘뭐라고 하는 것이냐?’의 의미. *동아밧줄 : 굵고 튼튼하게 꼰 줄. *갈밭 : ‘갈대밭’의 준말. 갈대가 우거.. 2020. 5. 27. 달 / 박목월 달 - 박목월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시집 《청록집》(1946) 수록 ▲이해와 감상 박목월의 시 은 1955년에 발행된 박목월의 제1시집 《산도화(山桃花》에 수록된 작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향토적 정서가 어우러진 박목월의 초기 시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달’을 제재로 삼은 이 시는 간결한 형식과 서정적인 풍경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그 안에 표현된 애상적 정서가 잔잔하게 전해지는 시이다. 3음보의 민요조와 비슷한 음운의 반복으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1연과 마지막 3연을 반복하여 수미 상관의 구성으로 시상의 .. 2020. 5. 27. 노동의 새벽 / 박노해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 2020. 5. 27. 권정생 - 가장 큰 아이 / 박남희 권정생 - 가장 큰 아이 - 박남희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아이를 알고 있다. 덩치가 큰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가장 큰 아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생명을 불어넣으며 우주처럼 점점 크게 자라나는 아이를 알고 있다 일제 시대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나무장수 고구마 장수 등을 하며 떠돌다가 결핵에 걸려 고생을 하고 마을 교회 종지기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동화를 써서 가난한 어린이를 돕고 싶어 했던 어른이면서도 아이보다도 더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 권정생 자신이 직접 지은 작은 오두막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와 가난하게 살면서도 평생 인세로 받은 돈 10억을 북한 어린이를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먼 나라로 소풍 간 아이, 강아지똥이나 몽실언니와 함께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 가.. 2020. 5. 26. 이제 오느냐 / 문태준 이제 오느냐 - 문태준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 시집 《그늘의 발달》(2008) 수록 ◎시어 풀이 *얼금얼금 : 굵고 얕게 얽은 자국이 듬성듬성 있는 모양. *울 : 속이 비고 위가 트인 물건의 가를 둘러싼 부분. *구럭 : 새끼를 드물게 떠서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그릇. *여남은 : 열이 조금 넘는 수. *배냇적 :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2020. 5. 26. 평상이 있는 국숫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 시집 《가재미》(2006) 수록 ◎시어 풀이 *평상 : 바깥에 놓고 앉거나 쉴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침상의 하나. *푸조나무 : 느릅나뭇과의 .. 2020. 5. 25.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시집 《맨발》(2004) 수록 ◎시어 풀이 *옥말려들다 : 안으로 오그라들다. *되 : 부피의 단위. 곡식, 가루, 액체 따위의 부피를 잴 때 쓴다. 한 되는 한 말의 10분의 1.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산수유나무의 그늘에 대한 참신한 문학적 발상을 통해 산수유나무의 그늘이 주는 배려와 편안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2020. 5. 24. 맨발 / 문태준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ㅡ,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 2020. 5. 23.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기는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리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와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 2020. 5. 22. 흙 / 문정희 흙 -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 2020. 5. 20. 새떼 / 문정희 새떼 - 문정희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 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 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 시집 《새떼》(1975) 수록 ◎시어 풀이 *포효(咆哮) : ①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음. 또는 그 울부짖는 소리. ② 사람·자연물 따위가 세고 거칠게 내는 소리를 비유한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하늘을 날으는 새떼를 보며 시인이 펼친 단상(斷想)을 담고 있다. 실제로 시 속에는 새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새떼의 날아오름을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들이 시의 공.. 2020. 5. 20. 찬밥 / 문정희 찬밥 -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 수록 ◎시어 풀이 *서릿발 : 서리가 땅바닥이나 풀포기 따위에 엉기어 삐죽삐.. 2020. 5. 17.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 덜미를 푸는 소름 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 시집 《어린 사랑에게》(1991.. 2020. 5. 17. 성에꽃 / 문정희 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시어 풀이 *니르바나(nirvāna.. 2020. 5. 16. 겨울 일기 / 문정희 겨울 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서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하게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서로 기대서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 번 열지 않고 반추 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 시집 : 《어린 사랑에게》(199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한겨울에 사랑하는 임을 잃은 상실감으로 외부와 단절한 채 자신이 겪는 이별로 인한 슬픔과 절망감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낮고 어두운 어조로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의 시간을 겨울 이미지로 설정하여 절망적·체념적 어조.. 2020. 5. 16. 찔레 / 문정희 찔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시집 《찔레》(198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의 고통을 이겨 낸 화자를 '찔레'로 비유하여, 임과의 이별로 인한 사랑의 아픔을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화자인 ‘나’는 사랑하는 임과.. 2020. 5. 16. 꽃씨 / 문병란 꽃씨 -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여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 《문병란시집》 (1970)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결실의 계절 가을에 받아 든 꽃씨를 보며, 내적 성숙에의 염원과 지향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는 생명의 계절인 여름을 지나 결실의 계절 가을에 이룬 성숙을 ‘꽃씨’에 함축하여 표현하고. ‘.. 2020. 5. 15. 직녀에게 / 문병란 직녀에게 -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고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 2020. 5. 15.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6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