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by 혜강(惠江)
2020. 5. 28.
일러스트 : 이상진<조선일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수록
◎시어 풀이
*맵찬 : 1. 맵고 찬. 2. 옹골차고 야무진
*봉(封)하다 : 1. 문, 봉투, 그릇 따위를 열지 못하게 꼭 붙이거나 싸서 막다. 2. 말을 하지 않다. 3. 무덤 위에 흙을 쌓다.
*앉은뱅이저울 : 바닥에 놓은 채 받침판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위쪽에 있는 저울대에서 저울추로 무게를 다는 저울. *금침(衾枕) : 이부자리와 베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그 뒤 자신의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수록하여 표제로 삼은 작품이다. 이 시는 ‘온달-평강 공주 설화’를 차용(借用)하여, 산동네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삶을 통해 사랑의 가치와 그것이 부재(不在)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역사 속의 평강 공주가 현대의 서울에 산다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데, 시적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함으로써 순수한 사랑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평강 공주는 사랑의 힘으로 온달의 이름을 빛나게 한 의리 있고 어진 여성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한 것은 삶의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지킨 평강 공주의 모습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며, 가난이라는 시련이 삶을 힘들게 하지만 이를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1연에서 화자는 가난 속에서도 사랑이 충만한 평강 공주의 신혼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치자꽃이 피는 신방’은 사랑이 풍요로운 공간이며, 서울의 산동네에서 꽃씨 봉투를 깁는 일을 하는 신혼의 새댁임을 밝히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는 산동네지만 화자는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하다는 역설적 인식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산동네의 가난과 삶의 비애로 마음이 아파 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가 되어 성숙한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감싸주고, 삶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화자는 멈칫거리며 띄엄띄엄 말한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고, 머뭇거리며 말하는 모습에서 새댁의 부끄러움과 진실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2연은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장안의 세태에 ‘온달과 평강 공주의 사랑이 존재하기 어려운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라며 허탈해한다. 여기서 ‘장안’은 1연의 ‘신방’과 대조되는 공간으로,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세태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장안’은 혼수나 가문, 비단 금침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세상이다. 화자가 꿈꾸는 평강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특히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라는 구절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평강공주의 순수한 사랑은 온달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인데, 지금의 세상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물질적 가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인들의 세속적인 사랑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태도가 느껴진다.
특히, 이 시는 순수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시적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하여, 산문적 진술을 통해 시적 화자의 마음을 긴 호흡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말줄임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과 함께 여운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는 '신방'과 물질적 가치에만 움직이는 부정적 공간인 '장안'을 대립시켜 따뜻한 사랑의 힘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지만, 신방 역시 서울(장안)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가치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 더구나 온달의 부재를 강조함으로써 물질적 가치 추구에만 연연하는 현 세태 전반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작자 박라연(朴蓏娟, 1951~ )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존재론적 슬픔과 타자를 향한 연민, 헌신의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너에게 세 들어 사는 동안》(1996),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빛의 사서함》(2009), 《생밤 까주는 사람》,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와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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