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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25

증도, ‘복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증도 ‘복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탐방 글·사진 남상학 증도 탐빙의 마지막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유적을 둘러보았다. 문준경 전도사(1891∼1950)는 증도를 비롯한 전남 섬 지역 성결교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복음 사역자였다. 증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문준경순교기년관과 그의 묘와 추모비가 있다. ㉧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 1891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17살 때인 1908년 3월 정근택 씨와 결혼하여 시가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해 1922년 1월 남편의 두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그후 목포로 떠나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1919년 시아버지의 별세로 3년 상을 치르고 정씨 문중의 효부로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 2023. 10. 31.
제주 황사평 성지,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제주 천주교 황사평 성지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글·사진 남상학 ▲황사평 성지 묘역 제주도 안의 천주교 성지로는 황사평 성지, 새미 은총의 동산, 대정 성지(정난주 마리아 묘), 용수성지(성 김대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 김기량 순교현양비, 관덕정 순교터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천주교 황사평 성지는 제주시 화북이동 5662-1(제주시 기와5길 117-22)에 있는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로, 천주교 제주 본당의 라크루(Lac routs, 具瑪瑟, 1871~1929, 마르첼리노) 신부가 홍종우(洪鍾宇) 제주 목사로부터 약 18,000평에 달하는 황사평(黃沙坪)을 양도받아 천주교 신자의 매장지로 조성되었다. ▲황사평 성지 입구의 안내 표지판 ▲황사평 성지 묘.. 2022. 11. 26.
갑곶순교성지, 천주교 순교현장에 우뚝서 그날을 증언하다. 갑곶순교성지 천주교 순교현장에 우뚝서 그날을 증언하다. 글·사진 남상학 강화도는 역사가 시작된 섬이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 제사를 지낸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숱한 역사가 펼쳐졌다. 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기도 했다.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자주 충돌한 역사의 현장이다. 염하의 활약은 조선 말기에 빛을 발한다. 이곳에서 통상개방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더구나 천주교도들에게 강화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선배 신앙인들의 피어린 자취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증에서 갑곶성지는 천주교 전파 초기 수많은 천주교도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슬처럼 사라진 순교의 현장.. 2022. 9. 17.
순교정신의 계승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방문기 순교정신의 계승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방문기 글·사진 남상학 ▲손양원 목사 추모상징탑 '사랑의 열매탑'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대에는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총면적 8만 4580㎡인 손양원 목사 유적지는 1,100여 명의 나환자들과 애환을 함께했으며 신앙을 지키다 순교당한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숨결이 살아있는 기독교 테마공원이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안내도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순례 코스로서 공원 안에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비롯하여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탑과 기념비, 3부자 묘, 손양원 목사 자신이 목회했던 성산교회(옛 애양원교회, 1982년 개명)와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용양원)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는 곳이.. 2019. 5. 27.
절두산, 서슬 퍼렇던 처형장이 이제는 도시에 포위된 순교 성지로 한강의 변화 지켜본 절두산 서슬 퍼렇던 처형장… 이제는 도시에 포위된 순교 성지로 황두진(건축가) ▲ 처형장이었던 절두산은 이제 순교 성지를 꼭대기에 이고 있다./황두진 조선시대 한양 안팎에는 몇 군데 처형장이 있었다. 도성 안에는 지금의 세종로 남단에 있던 군기감이 국사범들의 처형장이었다. 나머지 처형장은 모두 도성 밖 서쪽에 있었다. 현재 서소문공원 사업이 진행 중인 만초천변의 서소문 밖 처형장을 비롯한 용산구의 당고개와 새남터 처형장 등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던 것이 양화진의 절두산, 혹은 잠두봉 처형장이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한 장소다. 대원군은 같은 해 맞물려 일어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진출했던 양화진 인근의 이 장소가 갖는 상징성에 주목했다... 2018. 1. 21.
남한산성 순교성지, 선교 열정을 깨우는 순교의 터 남한산성 순교성지 선교 열정을 깨우는 남한산성 순교의 터 글 · 사진 남상학 ▲입구 현판 삼국시대 이래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약 1천400년 동안 산성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해 왔다. 그런데 왜 남한산성 안에 순교성지가 소재하고 있는 것일까? 천주교와 남한산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남한산성 순교성지를 찾아가 보았다. 남한산성이 천주교 성지가 된 이유 결론부터 말하면, 남한산성은 1791년 신해박해(辛酉迫害) 때부터 기해, 병인박해를 거치는 동안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종교의 보고’다. 한강이남 경기지역 교우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교터’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2017. 11. 6.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찾아서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찾아서 충남 서천군 서면 서인로225번길 61 (서면 마량리 251-1) / 041-952-1885 글 · 사진 남 상 학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포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성경이 전래한 뜻 깊은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서천군은 성경 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마량포구를 굽어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경전래지기념관을 지었다. 또 마량리 마을 초입의 더 높은 언덕 위에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첫 선교사 아펜젤러가 성경반포사업차 인천에서 서천으로 가던 중 어청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세웠다. 어청도는 거리상 마량리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였다.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의 규모는 연면적 3.. 2017. 6. 26.
서천 마량포구,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과 기념공원 서천 마량포구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과 기념공원 글 · 사진 남 상 학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해안 마량포구,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전해진 곳으로 알려져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이 개관되고 기념공원도 조성하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마량진 최초성경전래지는 2002년 한 고등학교 교사가 조선왕조실록 48권(순조실록 권19)에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고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연구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면서 발견됐다. 2004년부터는 서천 기독교계와 서천군이 나서 역사적 사실임을 재확인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비로소 역사적 현장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기록에 의하면, 마량포구는 1816년 영국 해군 머레이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서해안 탐사를 위해군함을 이끌고 .. 2017. 6. 24.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글·사진 남상학 ▲ 기념관 내에 있는 조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리고 그 구원"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고 한국기독교 선교 1백 주년을 기념하고자 설립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금박산 가슴팍에 자리 잡고 있다. 가을이면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이 아름답다고 붙여진 금박산의 가을은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은 날, 평생교육원 어르신들과 함께 다시 한국순교자기념관(양지면 추계리 산 84-1, 031-336-2825)을 찾았다. 기념관은 영동고속도로 양지나들목으로 나가서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4㎞쯤 가면 안내판이 나온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초입엔 숙식이 가능한 온누리교회의 선교.. 2015. 10. 27.
제천 배론성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 제천 배론성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성 떼르뚤리아노 *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성 예로니모 글·사진 : 남상학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배론성지가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소재한 산골 지형이 배(舟)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2012. 3. 5.
영광 염산교회, 77명이 순교한 한국교회 최대 순교지 영광 염산교회 77명이 순교한 한국교회 최대 순교지 - 공산군에 의해 몽둥이와 죽창으로 찔리거나 수장당해 - 글·사진 남상학 전남 영광군은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3대 종교성지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 영산성지와 불교의 도래지 그리고 개신교위 순교지를 보유하고 있는 종교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전국 최대의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종교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인 셈이다. 전남 영광은 6·25 당시 194명이 순교한 대표적인 개신교 순교지로 꼽히는 곳이다. 그 중에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담임목사:김태균, 061-352-9005 )는 당시 전체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한국 기독교 최대 순교지로 불.. 2009. 6. 22.
성공회 강화성당, 개화 초기 토착화에 성공 성공회 강화성당 토착화에 성공한 개화 초기 교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22 글·사진 남상학 * 성공회 강화성당 * 강화읍 관청리에 동서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건물이 있다. 얼핏 보면 사찰 같기도 한 건물은 뜻밖에도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설립된 한옥식 성당.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한옥 성당의 독특한 구조와 색다른 느낌에 매료된다. * 성공회 강화성당 안내판 * 이 성당은 강화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조마가 신부의 건축계획에 따라 1899년 11월 착공하여 1900년 11월 15일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축성하고,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경복궁을 지은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백두산 적송으로 짓기 위해.. 2009. 6. 22.
강화의 어머니교회, 교산감리교회를 찾아서 강화 교산교회 탐방 강화의 어머니교회를 찾아서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504-2) 글·사진 남상학 ▲구 교회 건물 밖에 세운 종탑(아래쪽은 담쟁이 덩쿨이 온통 감싸고 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없이 성장한 신앙공동체가 있을까? 강화도의 신앙역사는 감리교회 선조들의 꿈과 헌신으로 뿌려진 씨앗에 기초한다. 강화 교산교회는 1893년 존스(George Heber Jones, 한국명 趙元時, 1867-1919) 선교사의 복음전파를 통해 강화 최초의 자생적 공동체로 시작해 인근 지역선교의 초석을 마련했다. 따라서 교동교회는 강화도의 모교회인 셈이다. 선상세례(船上洗禮)로 시작된 신앙공동체 ▲존스 선교사(George Heber Jones, 한국명 趙元時, 1867-1919) 미 감리회 소속인 존스 선교사는 .. 2009. 6. 9.
강화 교동교회, 1899년 교동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강화 교동감리교회 1899년 교동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 기독교 초기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 - 글·사진 남상학 ▲분단의 아픔을 말해주는 교동해안의 철조망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해로 흘러가는 곳. 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고 물길로 분단을 가르고 있지만 지금은 세 강이 여기 강화의 교동도(喬桐島)에 와서는 하나로 흐른다. 교동도는 강화도(江華島) 북서쪽 4㎞ 지점 한강줄기가 황해로 이어지는 하류에 삼각주로 발달한 강화도의 부속섬이다. 면적 47.15㎢, 해안선길이는 35.97㎞에 달하며,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서울에서 지척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를 뚫어야만 했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 2009. 6. 9.
서울 명동성당,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서울 명동성당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 한때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인식되기도 - 글·사진 남상학 ▲한국천주교회의 상징 명동성당 전경 서울 중구 명동은 2가에 있는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본당건물인 명동성당(사적 제258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지난 세기 동안 우리 사회와 애환을 함께 나누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늘날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의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 성당이 자리잡기 전 명례방(명동) 일대 성당이 자리 잡은 명동 일대는 지난날 명례방(明禮坊)으로 불리던 곳이며, 명동성당 앞 고갯길을 북고개 또는 북달재라 하고 한자로 종현(鐘峴)이라 불렀는데, 이 곳은 정조 8년(1784)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직후부터 천주교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 2009. 4. 27.
횡성 풍수원성당, 신유박해 때 숨어서 지킨 천주교 신앙촌 횡성 풍수원 천주교회 풍수원, 신유박해 때 숨어서 지킨 천주교 신앙촌 - 한국인 신부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 - 글·사진 남상학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 마을에 세워진 천주교회 초봄의 햇살이 번지는 시골길을 따라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를 찾아갔다. 몇 구비의 산굽이를 돌아 네비게이션의 지침이 멈춰선 곳은 풍수원 마을. 행정구역상과는 다르게 이곳은 오래 전부터 풍수원마을로 불려져 왔다. 그 이유는 이렇다. ▲풍수원 성당을 설명하는 안내판 1800년대초 박해를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4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중 강원도 횡성군 서원리 지역이 산간벽지로서 산림이 울창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다고 여겨 정착하여 한 곳이 바로 한국 최초.. 2009. 3. 16.
안양 수리산성지, 병목골 깊은 계곡에서 만난 순교자 안양 수리산성지 병목골 깊은 계곡에서 만난 순교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 1151-6) ▲ 안양팔경 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 병목골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수리산성지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피난와 살았던 교우촌이자 최경환 성인의 유해를 모신 천주교 성지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은 아내 이성례와 함께 수리산 아래 담배촌에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며 천주신앙을 전파했다. 신자들이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했기 때문에 ‘담배촌’이라고 불렸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최경환은 천주교 신자들이 무수히 죽임을 당하자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2009. 1. 28.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감리교 초대선교사 순교의 얼을 찾아 군산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아펜젤러, 그 순교의 얼을 찾아 군산으로 글·사진 남상학 - 아펜젤러, 그는 ‘한국을 자유와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썩어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 ▲ 군산에 세워진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와 기념관 ▲기념관 벽에 새긴 아펜젤러 순교 추모시 “아무도 밟지 않은 툭 트인 바다 밑 묘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무덤 속에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잠들어 있다. 그는 그의 품에 영혼을 안고 천국에 들어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놀라게 한 것은 큰 소리나 대포의 연기가 아니며, 폭풍 위의 거친 숨결도 천둥도 아니다. 다만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 그리스도의 목소리 뿐” '아펜젤러 순교 추모시' 중 일부 2008년도 꽃재교회(구 왕십리감리교회) 장로부부수련회 장소로 초대 개.. 2008. 6. 20.
순교의 피 얼룩진 오천 갈매못 성지 보령 오천 갈매못 성지 순교의 피로 얼룩진 순교의 땅 글·사진 남상학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갈매못. 행정 구역으로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번지 '갈매못'. 이곳이 한국 가톨릭 최고의 순교 성지로 꼽는 곳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렀던 곳이다. 따라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갈매못은 이름마저도 .. 2008. 5. 9.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를 키워낸 신앙의 못자리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를 키워낸 신앙의 못자리 글·사진 남상학 대천으로 가는 길에 어딘가 들러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이 솔뫼성지였다. 마침 고난주간이어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탄생지인 솔뫼 성지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조부(김택현)를 따라 용인 골배 마실로 이사 가기 전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김진후. 1814년 순교), 종조부(김한현. l816년 순교), 부친(김제준. 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에 걸친 순교자들이 살던 곳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솔뫼는 한국 천주교사(韓國天主敎史)에서 신앙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 2007. 4. 12.
순교의 피로 얼룩진 괴산 연풍성지(延豊聖地) 괴산 연풍성지 순교의 피로 얼룩진 연풍성지(延豊聖地) 글·사진 남상학 ▲주차장에서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석과 형구틀- 연풍은 수안보에서 3번 도로를 이용, 경상북도 문경으로 넘어가는 문경새재의 서쪽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에서 직접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 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최단거리이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등성이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지로 일찍부터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천주교 연풍성지(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는 조선 정조 15년(1791) 신해교난(辛亥敎難) 이후 연풍.. 2006. 10. 20.
일제의 만행에 23명이 생명을 잃은 제암리교회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일제의 만행에 23명이 생명을 잃은 제암리교회 - 지역 만세 운동에 주도적 역할 담당한 교회 - 글·사진 남상학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교회 전경 소래교회의 탐방을 마치고 신갈-안산 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발안 IC로 빠져 나와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로 향했다. 제암리 감리교회는 일제의 만행으로 23명이 목숨을 잃은 순교의 현장이다. 일제의 탄압과 그에 항거한 독립 만세 1880년대 전반 외래종교로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개항 이후였기 때문에 1백 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처럼 격렬한 탄압에 직면하지는 않았지만, 토착 민족주의 세력은 개신교에 여전히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 두번째 지은 교회 모습 그러나 .. 2006. 4. 1.
안성 미리내성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 순례의 길' 안성 미리내성지 고난주간에 가 보는, 달빛 아래 은하수 미리내성지 -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 순례의 길' - 글·사진 남상학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라라' (요한 12: 24-25) 이틀 동안 몸을 옴츠리게 했던 꽃샘추위가 가시고 날씨가 화창하여 나들이에 적합한 날씨다. 성회수요일인 2월 9일부터 시작된 사순절에 이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며 사랑의 발자국을 내딛으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에 접어들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미리내 성지를 찾아갔다. 이곳은 천주교의 최대 성지로 손꼽.. 2006. 3. 29.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 잠든 고귀한 넋들 글·사진 남상학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혁의 진통을 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람의 터 밭에서 열매 맺은 그 믿음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여라" -정연희의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봉헌시”의 일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A. 드디어 쇄국의 빗장이 벗기고 양화진(楊花津)은 마포구 합정동에 있다. 양화진은 지리적으로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송파진과 함.. 2006. 3. 29.
절두산(切頭山), 그 순교의 현장은 말이 없고 .... 절두산(切頭山) 순교의 현장은 말이 없고, 무심히 한강수만 흐르더라 글·사진 남상학 옛날 양화나루는 풍경이 뛰어났다. 풍경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이곳을 찾았던 문인들은 저마다 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중종 때의 어세겸(魚世謙)은 나루터의 모습을 특히 잘 묘사하고 있다. 버들 꽃 다 날리고 버들가지 줄줄이 늘어졌는데 밀물이 닥쳐와 기슭이 잠기는구나. 노 저으며 노래 부르는 나루의 사공 언덕엔 어부의 딸이 그물을 말리고. 강변 저 멀리 별장이 보일락 말락 오는 소, 가는 말이 그치지 않고 강변에는 장삿배들이 총총하구나. 해지자 안개는 자욱하고 어기여차 뱃소리는 어디메선고. 양화진 일대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 2006.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