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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제천 배론성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

by 혜강(惠江) 2012. 3. 5.

 

제천 배론성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성 떼르뚤리아노
*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성 예로니모

 

 

글·사진 : 남상학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배론성지가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소재한 산골 지형이 배(舟)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배론성지는 제천10경에 속할 만큼 제천지역에서 가볼만한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배론에 천주교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순조1년(1801)에 있었던 신유박해 때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 험준한 지역에 숨어들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이곳이 성지로 지정된 것은 성지는 이곳이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1861년에 선종한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요셉)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이며, 또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 이뤄졌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黃嗣永)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帛書)를 쓴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배론성지에는 이들 유적 외에 배론본당,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성요셉성당, 황사영 순교헌양탑, 순교자들의 집(단체 피정의 집),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순례자들의 집, 사제관,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연못과 예수상, 성직자의 묘들이 있다.  

  배론성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 옆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이 연못 뒤에 높이 세운 예수상이다. 예수상 뒤로는 배론본당이다. 연못을 왼쪽으로 끼고 오르면 우측에 사제관이 보이고, 앞쪽으로 성 요셉신학교가 있다.  성 요셉신학교(후에 배론신학교로 개칭)는 1855년(철종6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다. 이 신학교는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 직무대행이었던 메스트로 신부가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설립하였고,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친 성직자 양성기관이었다.

 

 

 

   '성 요셉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고종3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현재 복원된 신학교는 충북 지방문화제 제 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학교 앞에는 신학당터임을 알리는 십자가 옆으로 푸르티메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의 상이 세워져 있다. 

 

  성 요셉신학당 뒤로 황사영 백서토굴이 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곳의 토굴에 약 8개월간 은거하면서 당시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상황과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帛書)를 토굴에서 집필하여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했다.

  토굴의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었고,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이었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 정도였다고 한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토굴과 옹기점은 없어졌으나, 토굴은 198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 옆 건물이 성 요셉성당과 황사영 순교헌양탑이다. 배론의 성요셉 성당에는 높이 20m로 입체4면 종탑 누각형으로 전면에는 ‘황사영순교현양탑’ 이라고 판각되어있다.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고, 누각 내부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종 3개가 달려있다.  탑 앞의 황사영 동상은 2005년에 화강암 기초위에 가로 73cm 세로 8cm 높이 235cm로 관복을 입고 하늘을 우러르는 형태의 동으로 만든 상이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황사영의 후손인 황병위 씨가 기증 건립한 것으로 북한에서 제작하여 일본을 통해 국내로 들여왔다고 한다.

 

 

 

   황사영순교현양탑을 뒤로하고 발길을 옮겨 조금 내려오면 꽤 큰 건물이 순교자들의 집이다. 이 건물은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집으로 단체 피정의 집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이어 개천을 건너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팔각정이고, 길은 바로 최양업 신부조각공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중앙제대 뒤로 타원형의 벽에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의 납골묘도 안치되어 있는 듯하다.

 

 



    공원 앞으로는 ‘최양업신부 기념성당인데 구원의 방주를 상징하듯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이는 성당으로서의 본질적인 의미인 동시에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이기도 하며 최양업 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시킴으로서 일석삼조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다. 

 

 



   개천을 따라 내려오는 길 우측에는 넓은 잔디밭인데, 야외제대가 있고 위쪽으로 성모자상이 산그늘에 서있다. 발길을 재촉하여 잔디밭 끝 지점에 오면 ‘미로의 기도’상이 있다. 이곳에 만들어 놓은 미로는 인생의 여정을 묵상할 수 있는 곳으로, 신자들에게는 결국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좀 지나면 ‘배론성지순례자들의 집’인데 대형식당인 셈이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야외식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한편, 사제관과 신학교 사이의 길로 오르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어지고, 길은 다시 십자가의 길로 이어지면서 성직자묘소와 최양업 신부의 묘로 이어진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문경(聞慶)에서 병사하자 푸르티에 신부 일행이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의 교리 번역 등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묘소는 배론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있어서 이곳에 서면 배론성지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서산에 지는 햇살을 등에 지고 배론 성지를 돌아 나오며 나는 생각해 본다. 일찍이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 불교의 뿌리가 내려졌듯이,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에는 많은 사제들과 신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공산치하에서는 많은 개신교 목사와 평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아낌없이 생명을 버렸다. 

 

 

 

 

   그들의 순교에 의하여 이 땅에 복음이 굳건하게 터를 잡았고, 순교의 거룩한 피가 면면히 흘러 생명의 복음이 꽃피워졌다면, 우리는 그들의 순교를 간단하게 치부하고 지나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의 고귀함을 깨달아, 그들이 삶으로 보여준 순교정신을 받들어 순교자적인 자세로 복음과 신앙을 후대에게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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