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by 혜강(惠江) 2015. 10. 27.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글·사진 남상학  

 

 

 

 

기념관 내에 있는 조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리고 그 구원"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고 한국기독교 선교 1백 주년을 기념하고자 설립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금박산 가슴팍에 자리 잡고 있다. 가을이면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이 아름답다고 붙여진 금박산의 가을은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은 날, 평생교육원 어르신들과 함께 다시 한국순교자기념관(양지면 추계리 산 84-1, 031-336-2825)을 찾았다. 기념관은 영동고속도로 양지나들목으로 나가서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4㎞쯤 가면 안내판이 나온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초입엔 숙식이 가능한 온누리교회의 선교훈련장인 온누리비전빌리지가 있다.  

  1866년 9월 5일 영국의 토머스 선교사가 북한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이래 2,600여 명이 뒤를 이어 숭고한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발전 뒤에는 이처럼 신앙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기념관에 이르는 길의 양옆에는 단정하고 반듯한 손글씨로 적힌 산상수훈과 잠언 구절을 적어 세워 놓은 복음 팻말이 끝나면, 유족들이 세운 높이 50㎝의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돌비)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순교자들의 이름과 성경 구절을 새겨넣은 기념비들이 길 양쪽으로 들어서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이들의 사열을 받는 것 같아 죄스럽기 그지없다.

 

 

 

 


  순교자 기념비들이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3층의 하얀 건물이 한국순교자기념관이다.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세워진 것이다. 1983년 당시 개신교 20개 교단은 '한국기독교 1백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천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기념관 완공에는 여러 장애가 있었다. 부지도 그렇고 당시 12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1986년 양지면 추계리에 있는 자신의 임야 34만 6,500㎡(10만 5,000평)를 헌납했고,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미실업가인 한규빈 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선뜻 내놓았다.

 

  이 자금이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고, 부족한 자금은 국내 많은 개신교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어,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한 뒤, 1989년 11월 18일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면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를 잡게 잡았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산 교육장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사람들의 정신을 기리고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이곳에는 1884년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이래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600여 명의 순교자 명단이 헌정되어 있다. 

 
 1991년엔 대한민국 건축가협회상을 받을 만큼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1,207㎡(366평)의 건물은 가운데 원통형의 공간이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3층 건물이다. 2005년부터는 100주년기념교회가 운영권을 일임받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입구에 걸린 김소엽 시인의 <순교자의 기도>를 읽고 관람에 들어갔다.  
 

 

 

 

 

 

"반만년/ 잠들어 있던 어둠의 역사가/ 신의 피로/ 다시 깨어나고/ 순교의 정신으로 / 새롭게 단장되었나니 당신은/ 축복 받은 이 백성의 아비일레/ 아브라함처럼/ 이 민족 한족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네 // 동방의 작은 횃불/ 삼천리 강산에 / 100년 전 복음의 씨로/ 등불이 켜지고 / 당신의 붉은 피는/ 지금도 우리 안에/ 꽃불로 타고 계시네/ 땅에서 죽고 / 하늘에서 부활하신 / 영광의 넋이여/ 목숨을 버림으로 / 생명을 얻은 / 영생하신 임들이여/ 하나님 품 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소서 // 아, 이 땅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땅/ 순교의 비싼 값을 주고/ 하나님이 사신 땅/ 일천만 열매여/ 복되고 복되어라/ 칠천만 우리 동포 / 모두 다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소서/ 당신이 목숨 버려/ 남겨주신 귀한 사랑/ 그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그 사랑 /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소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가 참수 직전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아래)과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를 촬영한 사진(위) 

 



  양측에 원추 기둥 두 개가 받치고 있는 출입구에 들어서면 대형 그림과 사진이 걸려있는 중앙홀이 나온다. 정면에 보이는 그림은 1866년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가 평양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가 참수 직전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그림은 한국 풍속화 및 기독교 성화의 대가인 혜촌 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의 역사화 중 하나다.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 작품은 모두 한국교회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림 위쪽에 걸려 있는 사진은 1984년 15일부터 19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를 촬영한 것이다. 이 선교대회에는 닷새 동안 300만∼400만 명의 인파가 몰렸던 역사적인 장면이다.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성도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뜨거웠던 신앙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 옆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관람이 시작된다.  2층으로 올라가면 우측은 회의실,  좌측은 예배실이다. 예배실에는 1930년대 이전의 선교 현장을 보여주는 기록사진과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설명 패널 12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초가 교회 앞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댕기 머리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는 교회 어린이들, 갖가지 사진 속에는 개화기 성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벽과 기둥이 걸려 있는 흑백 사진 중에는 희귀한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갖가지 그림자료(위)와 순교와 관련 서적(아래)들

 

 


 회의실에 마련된 서가에는 교계 관련 서적 860여 권이 비치되어 있다. 또한, 성서의 변천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시대별 성서 40여 권과 기타 문서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한국 교회의 순교 현장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6·25전쟁 당시 66명의 성도가 순교한 충청남도 논산시의 병촌교회를 비롯하여 영암교회, 진리교회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순교자들의 존영과 유품 앞에 머리 숙여

 

  좌우 전시실이 연결된 3층의 순교자 전시실에는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들의 초상화와 약력을 담은 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교회 순교자 중 330여 명의 존영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로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2,600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600여 명의 명단이 이곳에 헌정되어 있다.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개신교보다 100년 앞서 이 땅에 전래한 가톨릭은 네 차례나 극심한 박해를 당했다. 신해박해(1791년), 신유대박해(1801년), 기해대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대박해(1866)를 겪으며 약 3만 명의 순교자를 냈고, 후발인 개신교 역시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약 3천 명가량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개신교 순교자는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조선 총독 데라우찌를 기독교인들이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시작된 <105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사건은 기독교 애국지사들을 잡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음모였다. 어쨌든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개신교 지도자는 선교사를 포함해 모두 123명이었으며 그중 92명이 희생되었다. 

 

 

 * 김양선 목사의 부인 한필녀는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믿음의 딸로 남북을 세 차례나 내왕하면서 기독교 역사 사료를 반입하다가, 해주 앞바다에서 차녀 경숙(景淑)과 함께 공산군에 의해 피격당하여 사망하였다. 남편 김양선 목사는 후에 남한에서 기독교박물관을 설립했다 *


 
 
  또한, 1936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로 주기철, 이기풍, 최봉석 목사 등 수많은 지도자와 성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며, 해방 후에도 분단과 함께 북쪽 교회는 공산당에 의해 박멸당하며 많은 순교자를 냈고, 남쪽 교회는 6.25를 겪으며 역시 많은 순교자를 양산했다. 손양원, 김익두, 남궁혁, 송창근 목사 같은 지도자들이 다 이때 순교했다.

 

  특히 6.25를 전후해서는 집단 순교가 많이 발생했는데, 영암교회 24명, 상월교회 25명, 병천교회 66명, 진리교회 48명, 염산교회 77명, 야월교회 65명 등 전교인 혹은 일가족이 몽땅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우리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을 만큼 통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교신앙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노라”고 고백했다. 신학자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이러한 ‘죽으면 죽으리라’는 기독교의 절대 순교 신앙으로 무장한 한국교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복음을 전파하였고 교회와 사회를 성장시켰다.

 

 

 




"저들은 죽어서 말한다"(히11:4)


  건물 바깥에도 순교자공원을 조성하여 진입로에 기념비와 성경비, 순교자 기념 시비 등을 설치했고, 전면에는 백색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성경책 등 순교자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 시비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시 '옥중 명상'이 새겨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해 본다. 옥중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부끄러운 마음 감출 길이 없다. 요즘의 나 자신을 돌아보며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 기독교가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졌다.  만일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했던 북이스라엘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경청해야 하지 않을까 반성해 본다. 순교자 기념비 앞에서 나는 머리 숙여 간절히 기도하며 발길을 돌렸다. 

 

 



이 땅이 어둠의 세력 아래 있을 때, 
당신들은 복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다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아낌없이 던졌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교회가 있고, 
우리가 오늘 행복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소서.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11:4)
말씀하셨듯이    
복음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죽어간
당신들 무언의 교훈을 깨달아  
뜨거운 순교 신앙을 회복하게 하시고  
주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 꽃재교회 평생교육원 선교지 탐방 행사에서 말씀하시는 김성복 목사님(위)과 평생교육원 스탭과 회원들(아래) *    

 

  개관시간은 평일 및 토요일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5시까지이며, 주일은 휴관한다. 2007년에 엄일용 목사가 상주하며 찾는 이들에게 알기 쉽게 해설을 해 주고 있다. 과거에는 개신교 신도들이 주로 찾아왔으나 요즘은 신자와 비신자를 비롯하여 매달 6,000여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하니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한국 교회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