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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성공회 강화성당, 개화 초기 토착화에 성공

by 혜강(惠江) 2009. 6. 22.

 

공회 강화성당

 

토착화에 성공한 개화 초기 교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22

 

 

 글·사진 남상학


 

 

 * 성공회 강화성당 *

 

   강화읍 관청리에 동서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건물이 있다. 얼핏 보면 사찰 같기도 한 건물은 뜻밖에도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설립된 한옥식 성당.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한옥 성당의 독특한 구조와 색다른 느낌에 매료된다.

 

 

 

 * 성공회 강화성당 안내판 *



  이 성당은 강화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조마가 신부의 건축계획에 따라 1899년 11월 착공하여 1900년 11월 15일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축성하고,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경복궁을 지은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백두산 적송으로 짓기 위해 서해에 뗏목을 띄워 강화까지 자재를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1914, 1936, 1949, 1984)의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00년 트롤로프(趙瑪可, M. N. Trollope) 주교가 설계, 감독하여 건축한 것이다. 

 

 

 * 1916년 트롤로프(趙瑪可, M. N. Trollope) 주교에게 내린 면허장 * 



  성당의 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이 성당은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토착화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성당 - 울창한 숲으로 싸여 있다. * 

 


    강화도민들은 병인양요(1861년), 신미양요(1877년) 등 외침을 겪으면서 외국문명에 대한 저항감이 커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외래종교가 깊이 뿌리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일부 수용하는 토착화 방안의 지혜를 발휘했다. 이 방법은 민족적 신앙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특별히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우리 문화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워 우리 문화를 경시하거나, 불교와 같은 우리 전통 신앙을 배타적으로 대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 성전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 

 

*  성전 건물의 이모저모 *

 


  성공회 강화성당의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1칸의 장방형 2층 팔작집이며,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사제관으로 구성된 한옥건물이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에는 태극문양과 함께 십자가를 시문하였다. 지붕 위 용마루 양끝에도 십자가를 올렸다. 건물 정면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또 기둥(주련)에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적인 성구가 적혀져 있어 전통가옥 혹은 사찰에서 보는 주련과는 그 내용에 있어 사뭇 다르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神化周流츉庶物同胞之樂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  십자가 문양과 성경구절을 한글로 적은 종이 있다. *  

 

 * 각종 기념비 *


  

  외삼문을 들어서면 범종이 있는 종각과 종각성당건축 당시 강화지역선교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던 성공회 제2대 주교 터너(端雅德, A. B. Turner)와 성당건축을 직접 설계 감독하였던 제3대 주교 트롤로프의 영세기념비가 있다.

 

 

 

 

* 성당 내부구조 *

 

* 성수대 - 악을 제거하고 마음을 닦고 깨끗이 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퉁점  *



  성당의 내부구조는 입구인 앞 툇칸, 회중석(會衆席), 지성소(至聖所), 소제대(小祭臺), 제대, 예복실로 배치되어 있으며, 내부에 석제 성수대(聖水臺)가 있는 소위 바실리카양식이다. 성수대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수대는 직경 180cm의 팔각형 석판 위에 4개의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사방 80cm의 큰 성수대가 놓여있다.


  성수대 정면에는 “중생지천(重生之泉)”이라는 명문이 있어 거듭나는 샘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拒惡), 작선(作善)이라 새겨져 있다. 이 성수대는 신자가 회개하고 영세를 받을 때 사용한다.

 

 

 

* 지성소 안의 촛대(위)와 소제대(아래) *


 

  지성소는 성당 내부의 여섯 번째 고주와 아홉 번째 고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05cm의 난간을 두르고 있다. 회중석에서 들어가는 문은 영광문이라 하는데, 건축 당시의 옻칠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지성소 내부에는 화강암 제대(220×65× 80cm)가 있고 그 위에 십자가와 촛대를 안치하였다.


  또한 제대 위에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제대는 회중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으로서 예배시 집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성소의 북쪽 한 칸에는 소제대(높이 105cm)가 위치하고 있는데 성체를 봉안한 성막을 안치하였다. 이곳은 소형예배 때의 집례공간이다.

  성당의 뒤쪽에 위치한 사제관은 원래 주교관으로 1903년 반가(班家)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18칸 한옥이었다. 그러나 1984년 성당 기와교체 공사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86년 다시 지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 성공회 강화성당은 1981년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1호로 처음 지정된 이래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인천지방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가 2001년 1월에 국가사적 424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탐방에 동행한 교우들

 

 

 가는길 : 올림픽대로>강화방면 48번 국도>강화읍>성공회 강화성당(강화읍 관청리 42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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