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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강화 교동교회, 1899년 교동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by 혜강(惠江) 2009. 6. 9.

 

강화 교동감리교회

 

1899년 교동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 기독교 초기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 - 

   

 

글·사진 남상학

 



 

분단의 아픔을 말해주는 교동해안의 철조망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해로 흘러가는 곳. 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고 물길로 분단을 가르고 있지만 지금은 세 강이 여기 강화의 교동도(喬桐島)에 와서는 하나로 흐른다. 교동도는 강화도(江華島) 북서쪽 4㎞ 지점 한강줄기가 황해로 이어지는 하류에 삼각주로 발달한 강화도의 부속섬이다. 면적 47.15㎢, 해안선길이는 35.97㎞에 달하며,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서울에서 지척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를 뚫어야만 했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동북쪽으로 개풍군과는 8.5km, 서북쪽으로 연백군과는 3.0km 거리로 상당히 가깝다. 남북분단 이전에는 이곳 교동도와 연백은 생활권이 같기 때문에 왕래가 잦았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강화 교동대교

 


  교동도에 건너가려면 얼마전까지 강화도 창후리 화개해운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했으나 이제는 교동대교가 가설되어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다. 단 입구에서 신분증으로 신원확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강화도의 역사는 한반도의 태동과 함께 한다. 강화도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에 참성단(塹城壇)과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길상면의 삼랑성(三郞城) 등이 있고, 강화의 부속섬인 교동도 역시 화개산 서쪽에 고인돌이나 석기시대의 유물들(마제석검), 조개맨돌과 같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로부터 계속적으로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화도에는 일찍이 전등사(傳燈寺)가 있고, 교동도 역시 고려 시대 창건한 화개사 등이 있어 역사적으로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가 세워진 곳이다. 그러나 근대화와 더불어 강화도는 개신교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복음은 서울을 향해 전파되는 동시에 바닷길로도 전파됐다.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젤러(감리교)가 1885년 인천 제물포에 처음 들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언더우드는 주로 평안도에서, 감리교는 경기와 충청 지역에서 선교에 전념함으로써 강화도에는 감리교회가 단연 강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교동도에는 감리교회만 12개 교회가 있다. 그 중에서 1899년 세운 교동교회는 교동도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다. 강화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권신일 부부가 교동도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해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동교회의 시작이다. 그러나 교동교회의 성장에는 권신일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 중에 대대로 상룡리에 살았던 박성대 장로와 박형남 부자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박씨 일가의 말에 따르면, 일찍이 박성대 전도사의 할아버지인 박동엽 옹은 교동도의 갑부였는데,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 일행이 한양을 향하던 중 풍랑을 피해 잠시 교동도에 기착했을 때 이들을 환대하고 다시 중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강으로 들어오려다가 항해를 잘못하여 대동강으로 들어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그 동안 박성대 전도사의 가계에서는 지난 120년 동안 6대에 걸쳐 대략 200여 명의 후손들이 태어났고 그 중에 30여 명은 교역자로, 30여 명은 장로와 권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한국감리교회의 최초의 신학회 회원인 박성대 옹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성대 옹은 한국감리교 초대신학회를 수료해 한국감리교의 제1호 전도사로 임명 받았고, 그의 고향인 강화도의 작은 부속섬인 교동도의 모교회인 교동교회를 재건 설립하여 본처 전도사 겸 장로로 봉직하였다. 그는 또한 1903년 원산에서 하디선교사에 의하여 전개된 영적대각성 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에도 참여한 영적지도자였으며 그가 재건 설립한 교동교회는 현재는 한국기독교 유적교회로 성지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또 구한말인 고종 25년 이곳 교동면 상룡리 516번지에서 태어난 송암(松庵) 박두성 (朴斗星 1888~1963)은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는 한글 점자를 완성하였다. 그 뒤 한글 점자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출판하고, 1941년에는 점자로 된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완성하였다. 1935년 제생원을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39년 사임하였다. 6·25로 신약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하였다. 그는 평생을 맹인들의 교육에 전념하여 특수교육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2002년 4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2년 4월 문화인물로 박두성을 선정

 시각장애인 교육자, 한글점자 창안 및 보급,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간 회람지 촛불 발행, 성경전서 점역완성 등 업적을 남겼다. 

상룡리에 세운 교동교회, 종탑을 갖춘 전통적 교회모습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없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상용리 달우물에 종탑을 세운 교동교회는 지역 주민의 영적 각성에 크게 기여했다. 1933년 상룡리 516번지에 터를 잡을 당시에는 초가지붕이었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 양철지붕으로 바꿨다고 한다.    

 

   교동교회는 그 후에 끊임없이 성장하여 난정리에 난정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황해도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교인수가 크게 늘어나자 다시 대룡리에 교동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1979년 교인들의 분열로 교동교회가 교동제일교회로 나눠지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상룡리 교회 건물 앞에서 그간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박창혁씨(왼쪽) 

 


   처음 지을 때 초가였던 지붕을 1970년대에 푸른색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교회 옆에는 높이 세운 종탑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자물쇠를 채워 출입할 수 없으나 평소 이 교회를 관리하고 있는 박창혁씨( 032-933-4621 )의 호의로 교회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잘 정돈된 강단(위)과 오래된 풍금(가운데), 그리고 재봉틀 다리로 만든 테이블(아래)



  오래되어 마루바닥이 주저 않아 삐걱거리는 곳이 있으나 교회 내부는 청결하고, 교회 성구들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동안  교회 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교회 한쪽에 예전부터 사용해 온 듯한 오래된 풍금과 재봉틀을 변형해 만든 테이블은 그 옛날 선배들의 신앙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재봉틀 다리를 이용하여 위에 널판지를 올려놓은 테이불은 아마도 설교대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이후 교동도는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거주 인구가 급격히 줄고,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어서  교인의 수가 줄어 담임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인천시는 이 교회 건물을 100년 전 예배당이란 특수성을 고려하여 역사적 기념물로 인정, 문화재로 등록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곳 상룡리에는 교회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교회당 바로 아래에서 ‘달우물’이라는 물이 솟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박성대 전도사의 후손인 박용호 권사가 1991년 자신의 땅에 양어장을 만들 계획으로 땅을 파던 중 뜨거운 온천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 물은 칼슘 성분이 있는 신비한 물로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고 사람이 찾아들자 ‘베데스다 온천’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나, 그 물 맛이 짜고 써서 1994년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마라의 쓴물 온천장’으로 이름으로 바꿨다.(출15:23 : 그 곳에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마라  쓴물을 취수하기 위해 세워놓은 마라하우스 차량 



  그러나 교동까지 오는 데는 교통이 불편해 온천단지로 개발되지 못하다가 이곳의 물을 취수하여 탱크로리를 이용, 강화도 창후리로 옮겨 ‘마라칼슘탕’이란 간판을 붙이고 영업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길 건너에 큰 건물을 짓고 ‘마라하우스( 032-93...)’를 새롭게 오픈했다. 아토피성 질환 등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에 이용객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현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동교회, 월선 선착장에서 200m거리)

 

 

   교회를 둘러보고 강화로 나오기 위하여 월선포구를 향하던 일행은 선착장 못 미쳐에 있는 또 하나의 교동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이 교회(담임목사 구본선)는 교동교회와 분리되어 나와 교동제일교회를 섬기던 몇몇 교인들이 뜻을 모아 새로 건축한 교회로서  옛 교동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다. 

   교회의 분리가 교회 발전의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모두가 인간의 욕심과 아집에서 생겨난 일이 아니고 과연 순전한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생각해 보며 교동도를 빠져나왔다.   

  아무튼 강화도는 개신교 복음의 메카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기독교 사학자 이덕주 교수가 <눈물의 섬 강화이야기>에 이어 <강화기독교 100년사>를 정리한 바와 같이, 교동도를 포함한 강화도는 한국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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