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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122

가을날의 상념(想念) · 2 가을날의 상념(想念) · 2 - 낙엽 길을 걸으며 - 글·사진 남상학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프랑스 시인 구르몽(Rémy de Gourmont, 1858~1915) 의 「낙엽」 전문이다.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갯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 2022. 11. 9.
가을날의 상념(想念) · 1 가을날의 상념(想念) · 1 - 서울숲을 걸으며 글·사진 남상학 오늘 아내와 함께 서울숲 근처에서 점심을 하고 서울숲을 걸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과 떨어져 쌓여가는 낙엽 등 점점 회색 조(調)를 색깔이 주조를 이루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이맘때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가을날」이 생각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을 완성해 주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 2022. 11. 8.
여성의 미 / 피천득 여성의 미 피천득 “나의 여인의 눈은 태양과 같지 않다. 산호는 그녀의 입술보다 더 붉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정직한 말이다. 하기야 뺨이 눈같이 희다고 그리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장미 같다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애인의 입술이 산호같이 붉기만 하여도 그리 좋을 것이 없고, 그의 눈이 태양같이 비친다면 큰일이다. 여성들이 얼굴을 위하여 바치는 돈과 시간과 정성은 민망할 정도로 막대하다. 칠하고 바르고 문지르고 매일 화장을 한다. 하기야 돋보이겠다는 이 수단은 죄 없는 허위다. 그런데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젊은 얼굴이라면 순색 그대로가 좋다. 찬물로 세수를 한 젊은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Eh 있겠는가? 늙은 얼굴이라면 남편이 코티 회사 사장이라도 어여뻐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인형같이 .. 2022. 10. 18.
장미 / 피천득 장미 - 피천득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그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을 .. 2022. 10. 17.
3·1독립선언서 읽어보셨나요? 대한민국의 오늘 만든 3·1독립선언서 읽어보셨나요? 최문선 기자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 3∙1독립선언서의 첫 줄 ▲민족문제연구소가 보관 중인 3·1 독립선언서 원본. 문화재청 제공 1919년 3월 1일 전국 7개 도시에서 만세 시위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됐습니다. 독립선언서 한 줄 한 줄은 피끓는 분노였습니다. 애끊는 독립 염원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쓰고 종교 지도자 33명이 민족을 대표해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2월 28일 서울 종로구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초판 3만 5,000부를 인쇄했습니다. 3월 1일 이후에도 만세 시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학교, 교회에서 수 백, 수 천 부씩.. 2019. 3. 1.
최영미의 고발시 '괴물' 발표 이후, 이문열의 단편 ‘사로잡힌 악령(惡靈)’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 최영미의 고발시 '괴물' 발표 이후 이문열의 단편 ‘사로잡힌 악령(惡靈)’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 최근 우리 사회가 미투(MeToo-나도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 운동이 활발하다. 이는 지난 1월 29일 현직 서 모 검사가 자신이 2010년 남자 선배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그 와중에 2017년 12월에 발행된 에 최영미 시인의 고발시 이 발표되었다. 최 시인은 이 시에서 시인 자신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젊은 여성 시인은 물론 출판사의 여성 편집자 등에게 성추행을 일삼는 '괴물'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 시를 읽으면 '괴물'의 정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괴물'은 문단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추앙받고 있는 노(老) 시인 고은(高銀)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이.. 2018. 3. 8.
<수필> 청포도의 사상 / 이효석 청포도의 사상 / 이효석 육상으로 수천 리를 돌아온 시절의 선물 송이의 향기가 한꺼번에 가을을 실어 왔다. 보낸 이의 마음씨를 갸륵히 여기고, 먼 강산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눈앞의 가을에 눈을 옮긴다. 남창으로 향한 서탁이 차고 투명하고 푸르다. 하늘을 비침이다. 갈릴리 바다의 빛은 그렇게도 푸를까. 벚나무 가지에 병든 잎새가 늘었고, 단물이 고일 대로 고인 능금 송이가 잎 드문 가지에 젖꼭지같이 처졌다. 외포기의 야국이 만발하고 그 찬란한 채송화와 클로버도 시든 빛을 보여 준다. 그러건만 새삼스럽게 가을을 생각지 않는 것은 시렁 아래 드레드레 드리운 청포도의 사연인 듯 싶다. 언제든지 푸른 포도는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까닥이다. 익은 포도알이란 방울방울의 지혜와 .. 2017. 12. 20.
(수필) 영흥도, 그 아련한 추억을 찾아서 / 남상학 영흥도, 그 아련한 추억을 찾아서 -십리포 해변의 소사나무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었다. 글·사진 남상학 나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서해의 작은 섬 영흥도(永興島)를 찾는다. 서해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가량이면 둘러볼 수 있다. 영흥도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인천에서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2001년 선재도와 영흥도 간의 연도교인 영흥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이어졌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에게 영흥대교의 개통은 감격과 환희 그 자체일 것이다. 내가 영흥도를 즐겨 찾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1952년)이던 때 이작도(伊作島)에서 이곳 영흥도로 이사 .. 2017. 4. 3.
(수필) 인연(因然) / 피천득 인연(因然) / 피천득 지난 사월, 춘천(春川)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出講)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禮儀)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事緣)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표(동경, 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紹介)로 사회 교육가(社會敎育家)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지구, 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조자, 朝子)는 처음부터 나.. 2016. 5. 5.
<평론>한국(韓國)의 현대시 / 문덕수 한국(韓國)의 현대시 문 덕 수 (文德守)) 1 시(詩)의 내용(內容)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이다. 정서는 감화적(感化的) 요소(要所)로서, 유기체(有機體)의 전신적(全身的) 감각(感覺)이지만,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綜合物)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效用)이 궁극적(窮極的)으로는 감동(感動)과 쾌락(快樂)에 있으므로, 사상은 어디까지나 종속적(從屬的) 요소다. 그것은 언제나 정서와 융합(融合)이 되어 나타난다. 간혹 사상이 중시(重視)된 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외다. 만약 사상 위주(思想爲主)의 시가 있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시의 형식(形式)을 빈 철학적(哲學的), 수상적(隨想的) 단편(斷片)일 것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시로서 족하다. 아.. 2016. 3. 7.
(수필)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아버지의 뒷모습 신 달 자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손수건 한 장을 옆에 두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생긴 나의 버릇인데 이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어느 사이 손수건을 챙기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선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나보다도 우선 아버지 자신이 감정에 헤프지 않고 절제 능력이 있으시니 나도 따라서 이유에 앞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상에 헤픈 나이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면 한풀 물러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극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발걸음이 느려진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고 어느 장소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으며 눈물부터 난다. 혈육이 무엇인데 이리 가슴이 .. 2015. 10. 5.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와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히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라도 좋고 남성이라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2015. 8. 28.
(수필) 일하는 행복 / 안수길 일하는 행복 안수길(安壽吉) 알랭이 그의 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언제 생각을 해 보아도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고, 직책상 그것을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하품을 하거나 적적한 느낌이 들 때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란 일을 하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사실, 일에 열중하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에 일종의 리듬이 생겨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일한 자리가 생기게 되므로, 역시 일종의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2015. 3. 24.
(수필) 가난의 철학 / 한완상 가난의 철학 한 완 상 가난은 미워하되 가난한 사람은 돌보아야 하고, 가난은 물리쳐야 하되 가난한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가난은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은 가난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들어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가난을 줄여야 하고 마침내 그것을 없애야 한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것도, 그리고 그가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한 것도 사람을 사랑한 것이지, 가난 자체를 두둔하고 감싼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가난을 미워해야 하나? 가난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기에 미워해야 한다. 왜 잘못된 것인가? 가난은 언뜻 보면 순전히.. 2015. 3. 24.
(수필) 사치의 바벨탑 / 전혜린 사치의 바벨탑 - 전 혜 린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의 의존하는 것에서 얻은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게 하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 2015. 3. 24.
(수필) 생활인의 철학 / 김진섭 생활인(生活人)의 철학(哲學) - 김 진 섭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 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敎示)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絶緣)하고, 관외(管外)에 은둔(隱遁)하여 고일(高逸)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談論)에만 경청(傾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知覺)을 온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叡智)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良識)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이 일찍이 “내가 임마.. 2015. 3. 24.
(수필) 백설부(白雪賦) / 김진섭 백설부(白雪賦) 김진섭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릴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目禮)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 2015. 3. 24.
(수필) 행복의 조건 / 김형석 행복(幸福)의 조건(條件) 김 형 석 모두가 즐기기는 원하지만 삶의 가치는 추구하지 않는다. 누구나 느끼려고는 하지만 생각하기를 원하지를 않는다. 오락을 늘어가고 있으나 건설적인 대화는 메말라 가고 있다. 이러한 풍조는 자연히 학문보다 교양을, 지식보다는 상식을, 신념보다는 수단을 찾는 경향을 만든 것 같다. 깊은 내용의 책보다는 월간지를 택하고, 월간지를 읽던 사람은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고, 신문보다는 주간지를 찾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 같다. 젊은 학생들도 고전을 읽기보다는 영화에서 스토리를 알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저녁시간의 대부분은 TV로 보내 버린다. 그 결과 나타는 것이 책을 읽지 않는 사회, 공부를 포기한 민족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독서율이 가까운 외국.. 2015. 3. 23.
(수필) 사랑은 눈 오는 밤에(노변잡기) / 양주동 사랑은 눈 오는 밤에 양주동(梁柱東)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 ─ 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눈 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노변(爐邊)에 속삭이는 행복된 시간을 가지라. 어떤 이는 사랑이 나란히 걷는 중에서 생장한다고 말하여 혹시 봄밤에 꽃동산을 기리고 혹시 가을날의 단풍길을 좋다 하지마는, 나는 단연코 설야(雪夜)의 노변(爐邊)을 주장하는 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겨울밤의 기나긴 것은 어느 편이냐 하면 둘의 마음을 든든케 할 것이요, 더구나 노변(爐邊)의 그윽한 정조(情調)와 조용한 기분이며 설야(雪夜)에 다른 來訪者(來訪者)가 없으리라는 자신(自信)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선(禪)과 같이 침착하고 태연하고 유유(悠悠)해야 할 .. 2015. 3. 23.
(수필) 시적 변용에 대하여 / 박용철 시적(詩的) 변용(變容)에 대하여 박 용 철 핏속에서 자라난 파란 꽃, 빨간 꽃, 흰 꽃, 혹시는 험하게 생긴 독이(毒栮), 이것들은 그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그럴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이 정숙한 따님들을 그저 벙어리로 알아서는 안 된다. 사랑에 취해 흘려듣는 사람의 귀에, 그들은 저의 온갖 비밀을 쏟기도 한다. 저들은 다만 지껄이지 않고 까불거리지 않을 뿐, 피보다 더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피어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으로 남긴다. 지극히 예.. 2015. 3. 22.
(시론) 시의 생명 / 조지훈 시의 생명(生命) 시인 조 지 훈 1. 시적(詩的) 진실 - 자연미와 예술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스스로 이러한 물음을 다른 사람에게 받는 수가 많으나,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만족한 대답을 베풀 수 있는 이는 영원히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시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제각기 일가언을 세운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모두 개인이 느낀 시관일 따름이요, 따라서 넓은 시의 일부분의 설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인의 시관과 그에 따르는 작품 행동으로서 시를 두고 그밖에 따로 시라는 것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라는 명제는 시에서도 타당한다. 마치 꽃과 잎이 어울려 핀 곳에 그 꽃과 잎 사이에 있는 많은 차별상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꽃.. 2015. 3. 22.
(수필)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오상순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오상순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견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삼아 정원에 놓아 기르기 십개 성상이러니 금하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 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무문,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다시 외치며 제소리 울려 오는 편으.. 2014. 1. 11.
(수필) 선비정신 / 송건호 선 비 정 신 송건호 기사도(騎士道) 무사도(武士道)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 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에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심.. 2014. 1. 11.
(수필) 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 이어령 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이어령 통 나무를 잘라 보면 안다. 한가운데를 톱으로 자르면 동심원의 나이테 무늬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이 장작을 팰 때처럼 세워 놓고 자르면 그 동그라미들은 온데 간데 없고 물결처럼 흐르는 나무결의 곡선 모양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 때처럼 사선으로 비스듬히 쳐 보면 동그라미도,줄 무늬도 아닌 타원형 파문이 생겨나게 된다. 같은 통나무인데도 자르는 방식에 따라 이렇게 전연 다른 무늬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무늬도 그와 같이 변한다. 슬픔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풍요로 바뀌기도 한다. 나의 운명, 나의 가정 그리고 사랑과 사업, 또 이념이나 나의 조국 -- 그 모든 것들이 통나무를 자를 때처럼 다르게 변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2014. 1. 11.
(수필) 해학송(諧謔頌) / 최태호 해학송(諧謔頌) 최태호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 친구 집에 찾아가니, 주인이 차려온 술상에 안주라고는 채소뿐이었다. 주인이 미리 말막음으로 "집안이 구차해서 고기 한 점 안 놓여 미안하네." 하였다. 시쳇말로 green field였던 모양이다. 그 때 마침 마당에 닭 여러 마리가 나와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우스개 잘 하는 친구 말하기를, "대장부가 친구를 만나 어찌 천금을 아끼겠나? 내 당나귀 잡아 안주를 장만하게나." 하였다. 주인이 깜짝 놀라 "나귀를 잡아먹으면 자넨 무엇을 타고 돌아가겠나?" 그 친구 대답이 태연하였다. "닭을 타고 가지." 주인은 크게 웃고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서거정의 속의 한 토막이다. 대문장가로서 , , 등을 남긴 분의 글 속에서 왜 하필이면 이런 것이 나의 흥미를 돋.. 2014. 1. 11.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박완서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속 깊이 잠재한 환호(歡呼)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샌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없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 대소라도 할 기회나마 거의 없다. 의례적인 미소 아니면 조소·냉소·고소가 고작이다. 이러다가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일그러질 것 같아 겁이 난다. 환호하고픈 갈망을 가장 속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 해도 잘 싸우는 운동 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국제 경기에서 우리편이 이기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볼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일로 신이 .. 2014. 1. 11.
(수필) 고독과 사색 / 안병욱 고독과 사색 안병욱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괴테 제일의 탄생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나의 몸뚱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탄생이요 신체의 탄생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 1의 탄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 2의 탄생이 있다. 자아가 탄생하고 나의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 시대에 이것을 경험한다. 사람은 제 2의 탄생과 더불어 참된 자기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에는 제 1의 탄생밖에 없다. 동물은 정신 탄생과 자아의 탄생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제 2의 탄생을 갖.. 2014. 1. 11.
(수필) 딸에게 / 피천득 딸에게 피천득 '책 볼 기운이 없어 빨래를 하며 집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는 가벼운 하소연, 그러나 너의 낭랑한 전화 목소리는 아빠의 가슴에 단비를 퍼부었다. 전번 네 편지에 네가 외로움을 이겨 나가는 버릇이 생겼고 무엇이나 혼자서 해결하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여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고적은 따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이기에 일상생활의 가지가지의 환락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현대에 있어 연구생활은 싸움이다. 너는 벌써 많은 싸움을 하여왔다. 그리고 이겨왔다. 아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리 탐구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 2014. 1. 11.
(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 / 이희승 청추수제(淸秋數題) 이희승 벌 레 낮에는 아직도 9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이 전초역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을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인젠 확실한 가을이로구나!' 하는 영추송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한다. 달 전들을 끄고 .. 2014. 1. 11.
(수필) 싸리꽃 / 조병화 싸리꽃 - 조병화 지다 남은 꽃은 들판에 피어난 요염한 첫 꽃보다 더 사랑스러워라 그것은 더욱더 애절한 그리움을 우리 가슴에 안겨 주는 거 아, 그와도 같이 헤어질 땐 만날 때보다 더욱더 몸에 저려드는 것을. 이 시는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Pushkin)의 이다. 가을이 되면 머리에 떠오르는 싯귀절이다. 하늘에선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파릇파릇 풀잎이 남아있는 바람이 부는 늦가을 들 풍경, 그곳에 지다 남은 작은꽃송이 하나를 연상해 본다. 바람에 떨고 있는 그 애절,그 애련, 그 청초, 그 가냘픔, 그 사랑, 그 몸에 저려드는생명의 절감,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느끼며.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나의 장조카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쯤 나이가 많았던가 한다. 그 장조카의.. 2014.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