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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사랑은 눈 오는 밤에(노변잡기) / 양주동

by 혜강(惠江) 2015. 3. 23.

사랑은 눈 오는 밤에

 

양주동(梁柱東)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 ─ 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눈 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노변(爐邊)에 속삭이는 행복된 시간을 가지라. 어떤 이는 사랑이 나란히 걷는 중에서 생장한다고 말하여 혹시 봄밤에 꽃동산을 기리고 혹시 가을날의 단풍길을 좋다 하지마는, 나는 단연코 설야(雪夜)의 노변(爐邊)을 주장하는 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겨울밤의 기나긴 것은 어느 편이냐 하면 둘의 마음을 든든케 할 것이요, 더구나 노변(爐邊)의 그윽한 정조(情調)와 조용한 기분이며 설야(雪夜)에 다른 來訪者(來訪者)가 없으리라는 자신(自信)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선(禪)과 같이 침착하고 태연하고 유유(悠悠)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첫사랑은 나의 주장대로 설야(雪夜) 노변(爐邊)에서 고요히 말없이 행하여졌다. 일찍이 저녁을 마친 뒤에 방안에 흩어져 있는 약간의 서적(書籍)을 정리하여 서가(書架) 위에 올려놓고, 책상 위에는 수묵(水墨)빛 난초 한 분(盆)을 장식하여 놓고, 차를 다리기 위하여 화로에 불을 젓노라니, 가슴이 저윽이 설렘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죽어도 쳐다보지 않기로 한다. 나오는 줄도 모르게 입속으로 뜻없는 노래를 한두 절 읊조리고 있노란즉, 월녀(厥女)의 발자국 소리가 창 밖에 들려오지 않는가… 월녀(厥女)는 나의 방문을 나직이 두드릴 만큼 그 침착한 품위(品位)를 잃지 않는다.

 

  주인은 말없이 일어나 내방자(來訪者)의 망토자락의 눈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뜰 안에는 사분사분 내리는 눈이 벌써 한 자나 쌓였다. 월녀(厥女)는 망토를 벗고 말없이 화롯가에 와서 단정히 앉는다. 그러나 월녀(厥女)는 말이 없다. 주인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고요함을 두려워하여 날씨가 매우 추우니, 눈이 무던히도 많이 오느니 한다 하자.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일이 아니냐. 하물며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하소연하는 무슨 말이랴. 우리 사이에 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사실이거나 새로운 교양(敎養)임을 요한다. 이제 새삼 다시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랑은 결국 좌선(坐禪)은 아니리라. 그들은 애써 무슨 신통한 대화(對話)의 실머리를 찾고자 애쓰다가 필경은 무슨 평범한 일에서 단서(端緖)를 발견하여 최초의 난관(難關) 돌파하리라. 그담부터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혹은 땅콩을 까며(아니 군밤이던가?) 혹은 초콜릿을 벗기며, 차를 마시며 그리도 할 말이 많다. 밤은 길대로 길고, 눈은 끊임없이 내린다. 가다가 혹시 말이 끊겨져야 할 고비에 이르면, 둘 중에 하나이 화로에 놓인 부젓가락을 들어 재 위에 무슨 간단한 단어(單語) 말을 써도 좋다. 무심코 재 위에 무슨 글자를 썼다가 제가 쓴 것에 제가 놀라, 또는 저 편이 볼까 하여 도로 얼른 부젓가락으로 지우고 마는 심사(心思) 사람은 이러한 미묘(微妙)한 정서(情緖) 경험을 위하여 구태여 그의 애인을 여름날 멀리 바닷가로 데려가지 않아도 좋다. 화롯가의 재는 이 경우에 바로 바닷가의 모래이다. 이리하여 겨울밤은 깊은 줄도 모르게 점점 깊어간다…….

 

 사랑은 아무래도 설야(雪夜) 노변(爐邊)에서 할 것이다. 무릇 사랑에는 두 가지 전형(典型) 있으니, 하나는 전례(前例)의  제일장(第一場) 같은 벙어리의 사랑`─`일찍 칼라일이 에머슨과 만났을 때 무언(無言)으로 손을 쥐고 무언(無言)중에 반시(半時)를 대좌(對坐)하였다가 무언(無言)으로 다시 손을 쥐고 나뉘었다는 일화(逸話)가 있거니와 사랑하는 남녀도 종종 ‘첼시의 현자(賢者)와 ‘콩고오드의 철인(哲人)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드디어 제이장(第二場)과 같은 지껄이는 사랑`─`이 경우에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들의 대화(對話)가 어느덧 설야(雪夜)를 잠깐 지나 설조(雪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그들 사이의 작별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듣기에도 섭섭한 "good night"이 아니요, 쾌활하고도 신선한 "good morning"이 될 것이다. 일찍이 셸리는 재자(才子)였건만, 이러한 묘체(妙諦)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그 날 밤 무심코 종이 위에 그적거렸던  "Good Night"이라는 시(詩)를 지었겄다.

 

   굿나잇’이라고요? 아아 천만에

  합할 이를 나누는 밤은 언짢은 밤

  가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어요.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죠.

 

  그대의 인사는 천사같이 아름다우나

  내 어찌 쓸쓸한 밤을 좋다 이르리?

  그런 말, 생각, 이해(理解), 모두 말아야.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죠.

 

  해 지자 저녁부터 아침 빛까지

  가까이 다가드는 두 마음에는

  밤이란 좋은 게죠, 왜 그러냐면

  그들은 '굿나잇' 말 않기 땜에

 

  셸리의 안타까운 "good night"의 정경(情景)이 하필 설야(雪夜) 노변(爐邊)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만일 로맨스를 사랑하였다면, 그는 응당 나와 같이 그것들을 택하였으리라. 설야는 몰라도 적어도 영국의 시인(詩人)이면 노변(爐邊)을 사랑할 줄 알 것이니, 저 워즈워드도 사랑스러운 ‘루우씨의 노래’ 중에서 노래하지 않았는가. 

 

  너의 山 속에서 나는 참으로

  사랑의 기쁨을 느끼었노라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영국식

  불 옆에서 물레를 돌리었노라 

 

  여기서 "English fire"’라 함은 무론 그가 영국풍의 노변(爐邊)을 자랑삼아 그렇게 노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호반(湖畔)의 대시인(大詩人)도 역시 노변(爐邊)의 사랑을 즐기지 않았는가 ─ 시골 처녀와일 망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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