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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시론) 시의 생명 / 조지훈

by 혜강(惠江) 2015. 3. 22.

시의 생명(生命)

 

시인    조 지 훈

 

 

 

 

 

1. 시적(詩的) 진실 - 자연미와 예술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스스로 이러한 물음을 다른 사람에게 받는 수가 많으나,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만족한 대답을 베풀 수 있는 이는 영원히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시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제각기 일가언을 세운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모두 개인이 느낀 시관일 따름이요, 따라서 넓은 시의 일부분의 설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인의 시관과 그에 따르는 작품 행동으로서 시를 두고 그밖에 따로 시라는 것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 곧 본질> <특수 곧 보편>이라는 명제는 시에서도 타당한다. 마치 꽃과 잎이 어울려 핀 곳에 그 꽃과 잎 사이에 있는 많은 차별상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꽃과 잎을 피게 한 조건 곧 기후의 변화라는 작용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으로써 봄이라는 계절의 본질을 체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이라 하여 다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이미 사람이 사는 규범을 의식하는데서 비롯되듯이, <시라 하여 다 시가 아니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음은 시도 또한 시로서 공통된 통일감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공통된 시의 통일감은 설명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시 짓는 법을 설명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말뜻을 이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막스 자콥은 그 <시법>의 첫머리에 <위인은 위대한 금언을 생활하고 소인이 이것을 쓴다>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렇다. 시란 것은 진실한 생각, 진실한 느낌, 진실한 표현을 통하여 나오는 그 자신의 전인격적 체험에서만 스스로 체득할 수 있고, 이와 같이 시를 체득한 시인의 생명의 결정인 작품을 통하여서만 그의 최상의 작시법을 듣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에게서 시법을 묻기 전에 제 자신의 시에 대한 공부의 치열함이 어떤가를 먼저 반성해야 될 것이다. 고려자기의 고매한 살결과 청징한 빛깔을 구워내는 기법을 후인에게 전하지 않고 혼자 안은 채 죽은 종장(宗匠)이 있다고 해서 다만 그의 독선을 흉보고 허물하기 전에, 그 초일한 기법을 전하기에는 언어의 설명으로 베푸는 수단이 너무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고충도 위로해줄 아량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대대로 계승되어 오던 청자의 기법이 왜 끊어지고 만 것일까. 여기에는 청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지고 청자를 만드는 자랑과 이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그 시대와 사회의 공기를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 가르쳐 주어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안 배워서 없어진 것이라 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전통이란 무슨 공중에 매달린 두엉박처럼 생각한 나머지 따올려면 아무나 쉽게 따올 수 있고 버릴려면 언제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참 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 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의 비의(秘義, 비밀스런 의미)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하여 생성하는 자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대자연은 사물의 근본적인 원형으로서 여러가지 의미를 실현하고 있다. 대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그 자신 자연의 실현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자연을 저 안에 간직함으로써 다시 자연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대자연을 자연 전체의 위에 그 <본원상(本原相, Urphanomen>을 실현하지만 반드시 개개의 사물에 완전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써, 한갖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써 자연의 뜻을 현현(顯現)하는 하나의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는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그 연장으로써 다시 완미(完美)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뿐 아니라 모든 예술은 자연을 정련(精鍊)하여 그것을 다시 자연의 혈통에 환원시키는 것, 곧 <막연한 자연>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 있어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미의 구극(究極)이 예술미에 결정(結晶)되고, 예술미의 구극(究極)은 자연미에 환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훌륭한 자연을 사람이 만든 듯하다고 찬탄하는가 하면 훌륭한 예술을 자연의 솜씨 곧 신품(神品)이라고 찬탄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먼저 시의 소재는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간 생활 일체의 내용 속에 편만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의 소재로서 자연은 어디까지 소재일 뿐 그대로는 아직 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를 <넓은 의미의 시> 다시 말하면 <시정신>이라 부르고, 이 소재가 시인의 개성 있는 가슴과 손을 통하여 창조되어 이루어 진 것을 <참뜻의 시>라고 부른다.

그러면 시인이 창조하는 제2의 자연이라는 시는 어떠한 도가니 속에서 정련(精鍊)되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시의 태반은 무엇이며, 어떻게 시의 소재가 통일되어 생명을 받는가. 나는 시의 태반으로서 먼저 <저 자신의 생각>을 가지라고 말한다. 남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요, 남에게 배운 감각이 아니요, 남이 찾은 이념이 아닌, 저 자신의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이것은 벌써 개념도 지식도 이론도 아닌 그의 인격이요, 취미요, 감정이다. 남의 시, 남의 학문은 저 자신의 사상을 이루는 요소는 되지만, 저 자신의 사상이 없는 곳에는 저 자신의 시는 생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저 자신의 사상은 시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저 자신의 사상을 갖춘 사람은 모두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저 자신의 사상은 그 체득하는 방법, 탐구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길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길을 택하든지 저 자신의 사상에 철저한 모든 체험은 벌써 하나의 시정신을 체득하게 된다. 이 체득한 시정신을 시형식의 제약 속에 용화시켜 창조한 것이 시가 된다.


   어떠한 길을 취하든지 저 자신의 사상에 철저하게 되면 시정신을 체득한다는 말은 저 자신의 사상이란 곧 <우주의 생명의 직관(直觀)>에 통하는 길이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자기심화의 구극은 언제나 인생의 영위(營爲) 내지 자연의 현상 모두가 하나의 커다란 보람 속에 혈연적 유대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자각은 이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感性的) 인격에서 온다. 공통된 시정신이 있으므로 비로소 시를 사랑하고 느끼고 알 수가 있는 것이요, 시를 사랑하고 아끼고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시가 세상에 나오는 보람이 있고 시인이 존립할 근거가 서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읽고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 될 가능성 곧 소질을 가진 것은 틀림 없으나 저 자신의 시상 또는 시정신을 가진다는 말은 시를 쓸 수 있는 태반(胎盤)일 뿐 시를 쓰기까지에는 그 자신의 사상이 다시 <시를 위한 재편성>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시를 위한 사람의 재편성이란 말은 영혼의 모성인 시인의 배란작용(排卵作用)의 시초란 말이다. 시를 잉태할 수 있는 배란작용은 시를 받아서 앉힐 태반이 성숙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시를 생산할 수 있는 시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노래하지 못하는 새는 명금류(鳴禽類, 우는 동물류)에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를 알고 좋아한다고 시를 생산할 줄 모르는 사람까지 시인이랄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시를 참으로 알고 싶은 이는 시를 지어봄으로써 비로소 시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기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지만 모성애의 진수는 아기를 낳아보지 않고는 다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주의 생명이 나를 통하여 현현(顯現)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시는 하나의 인격이므로 이 인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노력으로서도 가능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시인은 <먼저 시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인생 의미의 새로운 발견을 언어의 음률적 조형(造型)을 통하여 개성적으로 형상화(形象化)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2. 카오스와 코스모스 - 시정신과 시인과 시작품의 관계에 대하여



   <시를 쓰면 이미 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서는 절대한 전일(全一)의 세계를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시랍시고 써 놓은 것은 실상 표현 이전의 직관적(直觀的) 감흥의 만분의 일도 못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일면의 진리를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언어가 우주를 대변하는 것, 언어의 제약이 정신의 비약을 주는 것이 시의 묘처(妙處)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면 이미 시가 아니다>라는 말에 나타난 <시>의 본질은 시정신, 곧 막연한 시의 소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정신을 음률로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요, 색채나 선으로 표현하는 것이 회화라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표현이 없는 것을 예술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시표현의 유일의 방법인 언어적 형성을 부인하는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시정신은 언어라는 형식을 빌리기 전에는 예술의 공통된 정신일 따름이므로, 우리는 <시정신을 톡특한 언어로 구성할 때 시가 된다>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시정신)을 쓰면 시가 된다>라는 정리(定理)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보편한 것을 여실하게 개성적으로 구체화 하기 전에는 예술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는 것은 시의 내적 성숙의 부족을 의미한다. 우리가 처음 시를 공부할 때, 그 많던 감흥이 붓만 들면 해 뜬 뒤에 안개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시를 못 쓴다는 것은 시정신이 시를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요, 시를 안 쓴다는 말도 시를 못 쓴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쓸 수 있는 시를 쓰지 않고 배길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만삭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시를 쓰면 벌써 시가 아니다는 말은 미숙한 사이비 시에 대한 경고로 삼을 것이요, 시를 못 써서 안쓰는 변명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표현함으로써 그 존재가치가 있으며, 그 본질적 면모가 나타나는 것이요, 표현을 통하여서만 저 자신의 사상은 혼돈 속에서 명확히 구체화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 공부는 하나의 인간 수업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시를 처음 쓴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남에게 애독될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조한 나머지 남을 속이기 위하여 저 자신을 속이는 것쯤은 쉬운 일이 되지만, 그 공부가 좀 깊어져서 참으로 시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남을 속이기보다 저 자신을 속이기가 점점 어려워 가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곧 시가 표현이라는 공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요, 시정신이란 시로써 표현될 생명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써 시에는 <나타나지 않은 시>와 <나타난 시>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전자는 시정신으로 모든 예술에 공통된 <에스프리> 곧 <포에지>란 것이요, 후자는 참뜻의 시로서 시만이 가지는 표현 형식임을 알았다. 따라서 참뜻의 시(詩)인 나타나는 시는 시인이라는 창조자를 통하여 산출되는 것이요, 시인은 시정신의 섭리를 받아 시를 산출하므로 시정신과 시인과 시는 서로 매개하고, 통일하고, 제약하여 떨어질 수 없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자연의 생명을 현현시키는 시인은 먼저 천분(天分)으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노력으로 사랑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대자연의 생명은 하나의 위대한 사랑이요, 또 그 사랑은 꿈과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생명 그것의 표현이요, 인간성 그것의 발현(發現)이다. 생명은 저 자신의 생을 긍정하는 것이 본성이요, 그 절대의 자기긍정을 생명으로 하는 시는 현실적 사실 위에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 현실로도 실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의 세계를 이루는 개개의 생명은 각각 그 본성의 요구대로 생을 긍정하면서 서로 사이의 생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생을 긍정함으로써만 자신의 생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이외의 일체의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삼는 영원히 전일한 세계가 감성적으로 구현되고, 특수한 언어로써 형상됨으로써 비로소 생명 그것의 순수한 실재(實在)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자라려고 하는 힘이다. 생명은 지금에 있을 뿐아니라 장차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꿈이 있다. 이 힘과 꿈이 하나의 사랑으로 통일되어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것이 우주의 생명이 아니겠는가. 우주의 생명이 분화된 것이 개개의 생명이요, 이 개개의 생명의 총체(總體)가 우주의 생명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자기 이외에서 찾는 저의 생명이요, 자기에게서 찾는 저 아닌 것의 혼(혼>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자기화하고 자기를 대상화하는 곳에 생기는 통일체 정신>이 시의 본질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의식과 우주의식의 완전일치의 체험>이 시의 구경(究竟)이라고 믿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 우주의 생명적 진실을 수정(受精)함으로써 시를 탄생시키는 것은 시인의 보편(普遍)한 지향(志向)이라 할 것이다.


   시의 세계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다. 하나의 우주이다. "往古來今 謂之宙 四方上下 謂之宇"라는 회남자(회南子)의 해석을 빌리면 우주는 시공(時空)의 통칭개념(統稱槪念)이다. 시의 우주는 실로 한편의 시를 통하여 영원한 시간과 무변한 공간을 통일한다. 질서 없는 혼돈(渾沌, chaos)이 질서와 통일과 조화를 이룬 것이 우주(宇宙, cosmos )이듯이, 시정신은 하나의 광대한 도(道)로서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무한한 카오스가 한편의 유일한 시로 형성되지만, 이 유한한 시는 전체의 상징적 분화로 <가시(可視)의 세계>를 뛰어넘어 <가고(可考)의 세계>에 통하가 때문에 시는 <유한을 계기로 이루어지는 무한자(無限者)의 의욕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옛 희랍 사람은 무한한 카오스에 대비하여 코스모스를 유한으로 보았지만 코스모스는 결코 유한한 것이 아니요, 성회(成懷)를 되풀이하면서도 무한히 지속하는 조화와 질서의 통일이다. <관념의 카오스>가 <시정신의 에로스>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시의 코스모스>는 바로 미(美) 그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느낌에 비취는 사랑의 모습이요, 개체 안에 있는 보편하고 영원한 이덴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말에 생각한다는 말을 사랑한다고 한 것을 아는가. <애(愛)>와 <모(慕)>가 나뉘아지지 않은 <사랑>, 이것이 바로 시정신이다. <에로스>이다.


   나는 위에서 시를 자연의 연장(延長)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단지 <모방(模倣, mimesis>의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토대로 한 기술 이상의 것, 다시 말하면 이데아 또는 생명의 원상(原像, urbild)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보편적 형상(普遍的形相, Universal Forms)의 리얼라이즈>라고 본 것을 타당하다 하겠다. 감각을 통하여 초감각의 세계에 사모친다는 것은 특수적인 것이 보편화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또 시를 시인을 통하여 창조된 제2의 자연이라 하였다. 시인에게 소재 또는 생명으로 주어진 일체를 직접미(直接美)라고 한다면, 그것으로서 표현한 시는 간접미(間接美)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간접미가 직접미의 모사(模寫)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간접미이면서도 하나의 창조적 이상미(理想美)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충동(衝動)과 이상(理想)의 규범(規範)이 자연히 일치되는 사람! 일거수일투족이 무비(無非) 법에 맞는 사람! 그가 바로 천성(天成)의 시인이다. 이런 사람이 사는 곳엔 도덕도 법률도 아랑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조화와 질서와 통일의 미는 교화(敎化)의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인, 우리는 철인정치의 뒤에 인류 정치(哲人政治)의 구경적 이상으로 시인정치를 생각할 수가 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이 고귀한 사명 속에 시의 종교성이 있다. 그런 날이 오는 날, 이 세상에는 시가 없어도 좋을 것이니 시는 찬송가나 주사(呪詞)에의 변성(變成)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인류문화 수천년의 에스프리에 시가 절멸되지 않고 이어온 것은 무슨 때문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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