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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우포늪 / 황동규 우포늪 - 황동규 우포에 와서 빈 시간 하나를 만난다. 온 나라의 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잇달아 금을 긋는 송전탑 송전선들이 사라진 곳, 이동 전화도 이동하지 않는 곳, 줄풀 마름생이가래 가시연(蓮)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비어 있는 그냥 70만 평,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다. 잠자리 한 떼 오래 움직이지 않고 떠 있고 해오라기 몇 마리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시간이 어디 있나, 돌을 던져도 시침(時針)이 보이지 않는 곳. -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2003) ◎시어 풀이 *줄풀 :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못이나 물가에서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마름 : 마름과의 한해살이풀. 연못이나 늪에서 자란다. *생이가래 : 생이가랫과의 한.. 2020. 11. 20.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 2020. 11. 16.
녹을 닦으며 –공초(供草) 14 / 허형만 녹을 닦으며 –공초(供草) 14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 시집 《공초》(문학세계사, 1988) ◎시어 풀이 *공초(供草) : 조선 시대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문서... 2020. 11. 10.
데스마스크 / 허만하 데스마스크 - 허만하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 수록 ◎시어 풀이 *데스마스크(Death Mask) :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얼굴을 본떠서 만든 안면상(顔面像).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바다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 눈을 죽음으로 인식하고, 바다를 데스마스크로 환치하면서 인간 존재의 죽음을 성찰하고 있다. 전체 6연 13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각 연이 짧은 2행(5연만 3행)의 절제된 구성이다. ‘바다’에 내리는 ‘눈’을 죽음으로 인식하고 ‘눈’의 이미지와 ‘바다’의 이미지.. 2020. 11. 7.
광고의 나라 / 함민복 광고의 나라 - 함민복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저기, 자본의 에덴동산*, 자본의 무릉도원*, 자본의 서방정토*, 자본의 개벽세상-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테크의 아침 역사를 듣는다 르네상스 리모컨을 누르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휴먼퍼니처 라자 침대에서 일어나 우라늄으로 안전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토피아의 전등을 켜고 21세기 인간과 기술의 만남 테크노피아의 냉장고를 열어 장수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스를 마신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누군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는, 드봉 아르드포 메이컵을 하고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꼼빠니아 패션을 입는다 간단한 식사 우유에 켈로크 콘프레이크를 먹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2020. 11. 3.
'그림자'와 '만찬' / 함민복 A. 그림자 - 함민복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수록 ▲이해와 감상 2005년 발표작인 이 시는 자신의 ‘그림자’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고 있는 지상의 모든 존재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어 고통 없는 세상이 펼쳐질 것을 염원하는 시인의 열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중심적인 제재는 ‘그림자’이다. 그림자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지니기 마련인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햇빛이 비치는 반대쪽에 형성된다는 점에서 밝음과 대비되는 어둠을 내포하며, 모든 존재가 지니는 아픔과 상처 같은 .. 2020. 11. 3.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 2020. 10. 31.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 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 시집 《모.. 2020. 10. 30.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 2020. 10. 27.
그 샘 / 함민복 그 샘 -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수록 ◎시어 풀이 *똬리 : 짐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받치는 고리 모양의 물건. *삽짝 : ‘사립문’의 방언 *미나리꽝 : 미나.. 2020. 10. 26.
'사랑하는 까닭'과 '사랑' /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시집 《님의 침묵》(1926) 수록 ◎시어 풀이 *홍안(紅顏) : 젊어서 혈색이 좋은 붉은 얼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진실을 담은 한 편의 사랑시(연애시)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노래하는 작픔.. 2020. 10. 25.
사랑의 측량(側量) / 한용운 사랑의 측량(側量) - 한용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여요. ◎시어 풀이 *양(量) : ① ‘분량·식량(食量)·국량(局量)’의 준말. ② 수량·무게·부피의 총칭. *측량(測量) : 기계를 써서 물건의 깊이·높이·.. 2020. 10. 24.
해당화 / 한용운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시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시집 《님의 침묵》(1926)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해당화’를 매개로 하여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과 야속함의 정서를 독백체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임이 덜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해당화 피기 전에 돌아오기로 한 약속을 지.. 2020. 10. 23.
찬송(讚頌) / 한용운 찬송(讚頌)* -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 시집 《님의 침묵》(1926) 수록 ◎시어 풀이 *찬송(讚頌) : ① 미덕을 기리고 칭찬함. ②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고 찬양함. 또는 그런 일. *산호(珊.. 2020. 10. 22.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 2020. 10. 19.
힘내라, 네팔 / 한명희 힘내라, 네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초급반1 한명희 세계 각국 사람들이 다 모이는 한국어 시간 앉아 있는 것만 봐도 세계 지도를 알겠다 미국 사람들 주변으로는 캐나다가 모이고 네팔은 인도와 짝이다 소란스럽고 질문이 많은 건 미국이나 호주고 베트남이나 라오스는 아무래도 말수가 적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는 네팔 여자의 남편이다 집사람, 잘 부탁합니다 한국어도 유창한 네팔 사람이다 일주일에 두 번 한국어 공부 끝나고 세 시간 그들의 유일한 데이트 시간이다 남편은 한국에서 아내는 네팔에서 그렇게 삼 년 남편은 불광동에서 아내는 영등포에서 또 그렇게 삼 년 일주일에 두 번 한국어 공부 끝나고 세 시간 네팔말이 한국말보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 시집 《두 번 쓸쓸한 전화》(2002) 수록 ▲이해와 감상 이 .. 2020. 10. 17.
신분(身分) / 하종오 신분(身分) - 하종오 한국 청년 지한석 씨가 하는 몸짓 손짓을 미얀마 처녀 파파윈한 씨는 가만히 바라본다 파파윈한 씨는 이주민* 이고 지한석 씨는 정주민*이지만 같은 공장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노동자여서 손발도 맞고 호흡도 맞다 공장의 불문율*에는 일하고 있는 동안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불법 체류* 합법 체류 구분하지 않고 출신 국가 구분하지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그녀도 안다 세계의 어떤 법령에도 노동하는 인간의 신분을 따질 수 있다고 씌어 있진 않을 것이다 한국 청년 지한석 씨가 내는 숨소리에 미얀마 처녀 파파윈한 씨는 가만히 귀 기울인다. - 시집 《입국자들》(2009) 수록 ◎시어 풀이 *이주민(移住民) : 다른 곳이나 나라에 옮아가서 사는 사람. *정주민(定住民) :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 2020. 10. 15.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 하종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 하종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을 닮은 아기를 등에 업은 앳된* 엄마 유모차에 태운 앳된 엄마 가슴에 안은 앳된 엄마 웃다가 미간* 찌푸리다가 눈빛 빛내며 무어라 무어라 재잘거린다. ​ 그때 앳된 엄마들 사이에 빼곡한 밀림이 흔들리다가 사라지고 탁한 강물이 출렁이다가 흘러가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다가 흩어지는데 그 옆에 선 남녀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지 몇 해 자신을 닮은 아기를 키우는 앳된 엄마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이따금 만나 친정 부모님이 그립다고 말하는지 친정집 뒤란*이 눈에 선다고* 말하는지 친정 동네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지 한국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베트남 어로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제각각 목적지 다른 시내버스를 타고 얌전하게 시.. 2020. 10. 15.
밴드와 막춤 / 하종오 밴드와 막춤 - 하종오 동남아에서 한국에 취업 온 청년 넷이 밴드를 만들어 연습하다가 저녁 무렵 도심 지하 보도에서 처음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공연 준비를 마치자 노인네들이 몰려와 둘러섰다 기타는 스리랑칸 베이스는 비에트나미즈 드럼은 캄보이단 신시사이저*는 필리피노 노름한 옷차림을 한 연주자들은 낡은 악기로 로큰롤*을 연주했다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자 다른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고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대자 다른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댄다 막춤을 신나게 추던 노인네들은 연주자들이 부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노인 한 분과 노파 한 분 다른 노인 한 분과 다른 노파 한 분 양손으로 살포시 껴안고 양발로는 엇박자*가 나도 돌았다 미소 짓던 동남아 청년.. 2020. 10. 13.
<동승>과 <골목길> / 하종오 * 하종오(河鍾吾, 1954년~ ) 시인은 1975년 《현대문학》에 〈사미인곡(思美人曲)〉등이 추천되어 등단한 이후, 1981년 첫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를 펴낸 이후 20여 권의 시집, 동화집 등을 냈다. 2004년 《반대쪽 천국》을 펴내면서 이주민 문제를 화두로 삼고,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 변화를 반영해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포괄한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 뒤에 나온 시집 《지옥처럼 낯선》(2006), 《국경없는공장》(2007), 《아시아계 한국인들》(2007), 《베드타운》(2008), 《입국자들》(2009) 등이 모두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2009년 나온 《입국자들》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이주민들을 바라본 시를 선보.. 2020. 10. 12.
원어(原語) / 하종오 원어(原語) - 하종오 동남아인 두 여인이 소곤거렸다 고향 가는 열차에서 나는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각각 무릎에 앉아 잠든 아기 둘은 두 여인 닮았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짐짓 차창 밖 보는 척하며 한마디쯤 알아들어 보려고 했다 휙 지나가는 먼 산굽이 나무 우거진 비탈에 산그늘 깊었다 두 여인이 잠잠하기에 내가 슬쩍 곁눈질하니 머리 기대고 졸다가 언뜻 잠꼬대하는데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말이었다 두 여인이 동남아 어느 나라 시골에서 우리나라 시골로 시집왔든 간에 내가 왜 공연히 호기심 가지는가 한잠 자고 난 아기 둘이 칭얼거리자 두 여인이 깨어나 등 토닥거리며 달래었다 한국말로, 울지 말거레이 집에 다 와 간데이. -시집 《아시아계 한국인들》(2006)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고향으로 가.. 2020. 10. 11.
저녁 그림자 / 최하림 저녁 그림자 - 최하림 여섯 일곱 살 때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도 열입곱 살 때도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반 고비 넘은 어느 날에도 갈매기들은 유리창 밖의 어린 모과나무 새에서 반투명체로 꽃들을 조으다가* 마주 보다가 날개를 푸드득이다가* 이윽고 먼 수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늙어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 시집 《작은 마을에서》(1982) 수록 ◎시어 풀이 *조으다가 : ‘쪼다가’의 잘못. 뾰족한 끝으로 쳐서 찍다가. *푸드득이다 : ‘푸드덕거리다’의 비표준어 (새가 날개를 크고 힘차게 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차분하고 성찰적인 어조로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 추.. 2020. 10. 9.
지금도 지금도 / 최영철 지금도 지금도 - 최영철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잠들어 있거나 명상에 젖어 온밤을 지새울지라도 미묘한 음반처럼 레미콘은 돌고 있다 등 돌린 그대들의 화합을 위하여 모래와 자갈은 아프게 물과 시멘트는 성질을 죽이고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에도 길을 걷거나 걷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화합을 위하여 그대들 먼 발치*에 우뚝 멈추어선 콘크리트는 위험하지 순하게 섞여 물에 물탄 듯 물에 물탄 듯 부서지지 않는 시멘트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자갈이 되어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오랜 미아*로 서성대는 그대들의 어깨너머 다시 만남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절망하지 않을 때에도 -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1987) 수록 ◎시어 풀이 *발치 : ① 누울 때 발을 뻗는.. 2020. 10. 8.
선운사에서 / 최영미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선운사 동백꽃의 낙화를 모티브로 하여 자연 현상의 하나인 꽃이 피고 지는 과정에 빗대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대응시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아파하는 시다. 화자는 선운사에서 꽃이 피고 지는 자연 현상에 주목하여 사랑과 이별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고 있다.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병치하여 의미를 강화화고, 동일한 시어를 반.. 2020. 10. 6.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 / 최승호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 - 최승호 어느 날의 하루는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다만 밥 먹기 위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저녁엔 여물통에 머리를 떨군 소가 보이고 달이 떠도 시큰둥한* 달이 뜬다 지난 한 해는 바쁘기만 했지 얼마나 가난하게 지나갔던가 정말 볼품없는* 돼지해였다 시시한 하루에 똑같은 하루가 덧보태져 초라한 달이 되고 어두운 해가 되고 참 시큰둥하고 따분하게*살았다 놀라울 것 없는 이 평범한 삶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빈 새장 같은 죽음의 얼굴은 이빨에 앵무새 깃털을 문 채 웃고 있는데 -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1994) 수록 ◎시어 풀이 *시큰둥한 : 달갑지 않거나 못마땅하여 시들한. *볼품없는 : 겉로 보기에 초라한. 보아줄 만한 데가 없는. *따분하게 : 재미가 없어 지루하고 답.. 2020. 10. 4.
아마존 수족관 /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글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 시집 《대설 주의보》(1983) 수록 ◎시어 풀이 *아마존강(Amazon River) : 남아메리카의 북부에 있는 안데스산맥에서 시작여 적도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 유역면적.. 2020. 10. 4.
북어 / 최승호 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들을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시원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시집 《대설 주의보》(1983) 수록 ◎시어 풀이 *케케묵은 : 물건 따위.. 2020. 10. 3.
노래와 이야기 / 최두석 노래와 이야기 - 최두석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시집 《대꽃》(1984) 수록 ◎시어 풀이 *심장(心臟) : 주기적인 수축에 따라 혈액을 몸 전체로 보내는, 순환계의 중심적인 근육 .. 2020. 10. 2.
낡은 집 / 최두석 낡은 집 - 최두석 귀향이라는 말을 매우 어설퍼하며* 마당에 들어서니 다리를 저는 오리 한 마리 유난히 허둥대며 두엄자리*로 도망간다. 나의 부모인 농부 내외와 그들의 딸이 사는 슬레이트 흙담집, 겨울 해어름*의 집안엔 아무도 없고 방바닥은 선뜩한 냉돌*이다. 여덟 자 방구석엔 고구마 뒤주가 여전하며 벽에 메주가 매달려 서로 박치기한다. 허리 굽은 어머니는 냇가 빨래터에서 오셔서 콩깍지로 군불을 피우고 동생은 면에 있는 중학교에서 돌아와 반가워한다. 닭똥으로 비료를 만드는 공장에 나가 일당* 서울 광주 간 차비 정도를 버는 아버지는 한참 어두워서야 귀가해 장남의 절을 받고, 가을에 이웃의 텃밭에 나갔다 팔매질* 당한 다리병신 오리를 잡는다. - 시선집 《망초꽃밭》(1991) 수록 ◎시어 풀이 *어설퍼하다.. 2020. 10. 1.
성에꽃 / 최두석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시집 《성에꽃》(1990) 수록 ◎시어 풀이 *성에 : 추운 겨울, 유리창이나 벽 따위의 .. 2020.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