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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녹을 닦으며 –공초(供草) 14 / 허형만

by 혜강(惠江) 2020. 11. 10.

 

 

 

녹을 닦으며 –공초(供草) 14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 시집 《공초》(문학세계사, 1988)

 

 

◎시어 풀이

 

*공초(供草) : 조선 시대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문서. ‘공초’(供招)는 조선 시대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아린 : 다친 살이 찌르듯이 아픈.

*회한(悔恨) : 뉘우치고 한탄함.

*혼신(渾身) : 온몸. 전신(全身).

*촉수(觸手) : 하등 동물의 촉감기. 혹은 ‘사물에 손을 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이사한 집 대문의 녹을 보면서 자신의 부패한 삶을 성찰하고 순수한 영혼의 회복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대한 염원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 <녹을 닦으며>는 그의 시집 《공초》(1988)에 담긴 65편의 연작시 가운데 하나이다. ‘공초(供草)’는 조선 시대 형사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공초’는 동학혁명의 주도자 전봉준의 공초 기록을 의미한다. 한말의 역사를 기술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동학도를 비적(匪賊)이라 했고 이후에도 동학란으로 규정했지만, 5.18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그 동학은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한 걸음 역사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시인도 ‘공초’는 부패하고 무능했던 봉건 정부의 학정과 외세의 공공연한 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의 분연한 궐기를 보여 준 역사의 기록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개인의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하며 스스로를 성찰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해 회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대문에 낀 녹을 닦으면서 반성한다.

 

  이 시는 19행으로 이루어진 단연시이지만,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1~6행에서는 이사 온 집 대문의 녹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과거 생활을 반성하는 내용이다. 7~11행에서는 회한으로 가득 찬 화자의 슬픈 생애와 역사를 극복하려는 안간힘을 노래한다. 그리고 마지막 12~19행에서는 치열하고 적극적인 자기반성의 행위와 다짐을 드러내고 있다.

 

  첫 부분에서 화자는 이시 온 집의 대문에 슬어 있는 흑갈빛의 녹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의 내면에 슬어 있을 녹을 생각한다. 여기서 이러한 자기반성의 행위는 ‘녹을 닦는’ 행위로 형상화된다. 화자는 녹을 닦으며 더럽혀진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운 인식으로 ‘손이 아린’ 것을 느낀다.

 

  7~11행에서는 화자의 개인적 부끄러움이 역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지만, 그 몸부림이 미미함을 느낀다.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에서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이 개인적 차원의 부끄럽고 죄스러움이라면, ‘회한의 슬픈 역사’는 역사적 차원에서의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다. ‘비늘 총총히 돋혀 있는’은 과거의 죄스럽고 부끄러운 삶이 지워지지 않고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의미하며,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이란 쳐 보았으나, 그것은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미약하고 나약한 것이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12~19행에서 화자는 치열하고 적극적인 자기반성의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가 생각하기에는 마흔세 해 자신의 과거 삶에서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시대와 역사를 걱정하는 역사적 의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 같은 역사에 대한 순수한 사랑까지 ‘노을’이나 ‘바람’ 앞에서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으로 뒤덮여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러기에 화자는 더럽혀진 영혼으로 인해 순수한 사랑까지 녹이 슬었다는 인식 아래,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을 통해 화자는 순수한 영혼과 역사적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비늘처럼 총총히 돋은 역사의 고비마다 그 정신과 동떨어진 곳에서 내 몸의 보전과 안일만을 추구했던 것을 통절하게 반성한다. ‘나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언제 한번 혁명의 눈빛으로 세상과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부끄럽고 죄스럽기도 한 삶에 대하여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녹을 문지르며 나를 반성해 본다.

 

  시인 허형만은 ‘전봉준 공초’를 원용하여 민족의 비극적 역사에 맞선 전봉준 장군의 치열한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이런 치열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역사 앞에서 자신의 나태하고 타락한 과거의 삶을 반성하고, 또한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반성하며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한 치열한 삶, 깨어있는 정신, 의식의 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안일하고 나약했던 역사의식을 반성하며 순수한 영혼과 역사적 실천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단하고 있다.

 

 

▲작자 허형만(許炯萬, 1945~ )

 

  시인. 전남 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에 시 <예맞이>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그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초월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은 주로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을 중심축으로 해서 전개되어 왔는데 후기로 올수록 내면 성찰을 통한 초월적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집으로 《청명(淸明)》(1978), 《풀잎이 하나님에게》(1986), 《모기장을 걷는다》( 1985), 《입맞추기》(1987),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 《공초(供草)》(1988),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비 잠시 그친 뒤》(1999), 《영혼의 눈》(2002), 《첫차》(2005) 등이 있다. 그 외 수필집으로 《오매 달이 뜨는구나》와 평론집으로는 《시와 역사 인식》, 《영랑 김윤식 연구》, 《부드러운 시론》, 《우리 시와 종교사상》, 《문병란 시인 연구》가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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