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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저녁 그림자 / 최하림

by 혜강(惠江) 2020. 10. 9.

 

저녁 그림자

 

- 최하림

 

  여섯 일곱 살 때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도 열입곱 살 때도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반 고비 넘은 어느 날에도 갈매기들은 유리창 밖의 어린 모과나무 새에서 반투명체로 꽃들을 조으다가* 마주 보다가 날개를 푸드득이다가* 이윽고 먼 수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늙어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 시집 《작은 마을에서》(1982) 수록

 

◎시어 풀이

*조으다가 : ‘쪼다가’의 잘못. 뾰족한 끝으로 쳐서 찍다가.

*푸드득이다 : ‘푸드덕거리다’의 비표준어 (새가 날개를 크고 힘차게 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차분하고 성찰적인 어조로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 추구할 수밖에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숙명적인 한계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전개 과정은 시간의 진행 과정에 따라 이루어지며, 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적 상황으로 내용이 구성되고 있다. 이 시는 모두 4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연과 4연은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풍경과 상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의 절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에 갈매기가 바다를 날고 있었던 것처럼 중년이 된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갈매기는 먼 수평을 날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갈매기가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말해 '갈매기'로 표상된 화자가 지향점이자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있는 바다에 끝내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슬픔은 인간 보편의 슬픔으로 확장되어, '저녁 그림자'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여섯 일곱 살 때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알고 있었다’고 표현하면서 어린 시절의 내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시의 전개에서 ‘바다’와 ‘갈매기’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갈매기'는 화자를 표상하고, '바다'는 갈매기가 지향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갈매기’가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는 점에서 화자는 어떤 지향과 동경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연의 시적 구조 또한 1연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열여섯 혹은 열일곱 정도의 청소년 시절에도 어린 시절의 그러한 동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3연에서는 중년을 넘긴 때에도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그만둘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갈매기들은 유리창 밖의 어린 모과나무 새에서 반투명체로 꽃들을 조으다가 마주 보다가 날개를 푸드득이다가 이윽고 먼 수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갈매기들이 어린 모과나무 사이에서 꽃들을 쪼고, 마주 보고, 날개를 푸득이는 행위는 낭만적이면서도 다양한 중년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윽고 수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라는 부분에서 ‘바다’로 상징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4연에서는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한 동경을 유지할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기에 숙명처럼 슬픔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상을 잔잔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늙어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라고 예상한다. 여기서 화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이 인생의 전 과정에 걸쳐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쫓아 왔으나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기까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갈매기는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날아가지만, 진정한 바다의 모습을 알 수 없고, 그것의 심연조차 알기 어렵다. 그러할 때 숙명처럼 슬픔과 한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구하는 대상은 항상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이므로 결국은 슬픔과 한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동경이 있는 곳에 ‘저녁 그림자’는 숙명처럼 드리워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자 최하림 (1939년~2010)

  시인. 전남 신안 출생. 본명은 최호남(崔虎男).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색수기(灰色手記)>가 입선되었고, 1964년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散文時代)’ 동인으로 활동했다. 강렬한 현실 비판이나 고발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내면적인 성격이 강하한 시를 썼다.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1976), 《작은 마을에서》(1982), 《겨울 깊은 물소리》(1986),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1991),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등이 있다. 시론집으로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시와 부정의 정신》, 산문집 《붓꽃으로 그린 시》, 《우리가 죽고 죽은 다음 누가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인가》, 《시인을 찾아서: 최하림의 문학 산책》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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