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原語)
- 하종오
동남아인 두 여인이 소곤거렸다
고향 가는 열차에서
나는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각각 무릎에 앉아 잠든 아기 둘은
두 여인 닮았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짐짓 차창 밖 보는 척하며
한마디쯤 알아들어 보려고 했다
휙 지나가는 먼 산굽이
나무 우거진 비탈에
산그늘 깊었다
두 여인이 잠잠하기에
내가 슬쩍 곁눈질하니
머리 기대고 졸다가 언뜻 잠꼬대하는데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말이었다
두 여인이 동남아 어느 나라 시골에서
우리나라 시골로 시집왔든 간에
내가 왜 공연히 호기심 가지는가
한잠 자고 난 아기 둘이 칭얼거리자
두 여인이 깨어나 등 토닥거리며 달래었다
한국말로,
울지 말거레이
집에 다 와 간데이.
-시집 《아시아계 한국인들》(2006)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동남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들이 꿈 속에서는 모국어를 말하고 아이들에게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르쳐야 하는 동남아 여인들의 삶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는 결혼 이주민 여성들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그들의 삶의 애환을 주제로 삼고 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과 같이 시상이 전개되는 이 시는 짧고 간결한 문장을 활용하여 사실적 서술 위주로 시행을 전개하며, 평이한 시어로 화자의 경험을 차분하고 솔직담백하게 진술하고, 이를 자신의 내면적 성찰로 연결시키고 있다.
전체 1연 23행으로 구성된 이 시의 앞부분은 열차에서 우연히 본 동남아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화자의 모습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뒷부분은 그러한 관찰의 시선을 화자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으며, 마지막 행에서는 화자를 각성할 수 있게 하는 여인들의 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행~8행에서 화자는 고향 가는 열차 안에서 아이를 안고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동남아 출신 두 여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짐짓 차창 밖 보는 척하며 한마디쯤 알아보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들에 대한 화자의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9~11행에서 화자는 ‘휙 지나가는 먼 산굽이 / 나무 우거진 비탈에/ 산그늘이 깊었다’고 표현한다. 화자는 휙 지나가는 산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말 속에서도 짙은 산그늘처럼 드리운 고단한 그녀들의 삶을 발견하고 있다.
12~15행에서 화자는 창밖의 산 풍경을 보다가 슬쩍 곁눈질했을 때 그녀들이 모국어로 잠꼬대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이 졸면서 그들의 모국어로 잠꼬대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원어(原語)인 것이다.
16~18행에서 화자는 그들이 모국어로 잠꼬대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이주 여성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는 두 여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아함을 품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가 왜 공연히 호기심을 가지는가’라고 묻는 화자는 태도는 그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며 인식의 전환을 보인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그들을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일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우리와 다른 이방인으로 인식하려는 편견과 차별적 인식에서 기인한 것임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19~23행은 잠에서 깨어나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는 두 여인의 나직한 경상도 사투리가 모국어 잠꼬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제시되고 시상이 마무리된다. ‘한국말로/ 울지 말거레이/ 집에 다 와 간데이’의 시행은 청각적 심상으로 도치법을 사용하여 화자를 자각하게 하는 일종의 반전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 화자는 그녀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그녀들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했던 인식에 반성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결혼 이주 여성들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특히 이중(二重)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은 한국에서 결혼, 출산, 양육 등을 경험하며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어가 새로운 원어가 된다. 결국, 결혼 이주 여성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의식 전반을 지배해 왔던 모국어와 새로 배우는 한국어 사용의 이원적 언어 구조 속에서 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종오 시인의 주된 관심사인 다문화 구성원들이라는 제재와 구성을 비슷하게 취한 작품으로는 <시내버스정류장에서>가 있다.
▲작자 하종오(河種五, 1954 ~ )
시인.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에 〈사미인곡(思美人曲)〉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80년 ‘반시(反詩)’ 동인으로 참가했다. 초기에는 강한 민중 의식과 민족의식을 기초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등의 삶과 애환을 다룬 시들을 주로 창작하고 있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1981), 《사월에서 오월로》(1984), 《넋이야 넋이로다》(1986), 《젖은새 한마리》(1990), 《쥐똥나무 울타리》(1995), 《아시아계 한국인들》(2007), 《입국자들》(2009), 《제국》(2011)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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