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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by 혜강(惠江) 2020. 10. 27.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 시집 《우울 씨의 1일》(1990) 수록

 

 

◎시어 풀이

 

 

*소슬바람 : 가을에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부는 바람.

*수액(樹液) : 땅속에서 나무줄기를 통해 잎으로 올라가는, 양분이 되는 액.

*자양분(滋養分) : 자양이 되는 음식의 성분.

*중력(重力) : 지구 위의 물체가 지구 중심으로부터 받는 힘. 지구 위의 물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自轉)에 의한 원심력을 합한 인력.

*우주(宇宙) : 모든 천체를 포함하는 전 공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사과를 먹는 경험을 통해 깨달은 생명 순환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일상적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거대한 우주의 힘(섭리)에 대한 경탄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일상의 친숙한 소재인 ‘사과’를 먹으며, 지금 이 사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모든 것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즉 이 시의 사과는 그 존재를 위해 길고 긴 머나먼 과정을 밝아 온 일상의 사물인 것이다. 화자는 이 시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일상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연구분 없이 24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유사한 문장 구조와 시어를 반복하여 운율감을 형성하고, 점층적으로 의미를 확대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후반부 3행을 ‘들여쓰기’하여 인식의 비약을 강조하고, 마지막 행에서 반전(反轉)의 표현을 통해 익숙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시는 사과를 먹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일상적 소재를 존재하게 한 자연물, 인간의 노력, 자연의 순환 과정, 생성과 소멸의 순환 원리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1~2연에서 화자는 일상의 친숙한 소재인 ‘사과’를 먹으면서 3~9행에서는 사과를 먹는 것은 사과와 함께한 자연물인 ‘햇살, 장맛비, 소슬바람, 눈송이, 벌레, 새소리, 잎새’를 함께 먹는 것임을 드러낸다.

 

  10~12행에서는 화자가 인간의 노력인 ‘사람의 땀방울, 식물학자의 지식,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기억하며 사과를 먹는다. 여기서 ‘딸이 바라보던 하늘’은 사과나무집 딸이 사과의 성숙을 위해 뜨거운 햇빛을 기원하며 바라보던 하늘인 것이다.

 

  13~19행에서는 사과를 먹는 화자의 느낌이 사과나무를 이루는 요소와 순환 과정으로 확장된다. 즉 사과가 열리기까지의 씨앗과 자양분인 흙과 자탱해온 뿌리와 수액을 공급하는 가지, 그리고 사과가 열릴 수 있는 세월(나이테)들이 함께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사색하며 사과를 먹는다.

 

  20~24행에서는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라고 하여, 생명 순환의 원리를 발견한다. ‘흙에서 도망쳐 보려다’라는 것은 쑥쑥 자라 높은 나무에 열리는 사과를 드러낸 것이며,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론적 인식을 표현한 것으로, 시행의 ‘들여쓰기’를 통해 인식의 비약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에서 여태까지 내가 먹던 ‘사과가 나를 먹는다’라고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익숙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사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과에 숨겨진 우주적 의미와 생명론적 순환에 압도된 화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과를 먹는 것은 사과를 존재하게 한 우주를 먹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순환하는 생명의 원리에 참여하는 가치 있는 일이 된다는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사과를 먹으며, 사과와 함께하며 사과를 존재하게 만든 모든 것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즉, 사과를 존재하게 한 자연, 사과를 키우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순환의 역사 등 사과를 존재하게 한 모든 것으로 사고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사고의 확장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가치 있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일상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 삶의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작자 함민복(咸敏復, 1962 ~ )

 

 

  시인. 충청북도 충주 출생. 1988년 〈성선설〉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들을 따뜻하고 진솔한 언어로 끌어안는다서정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우울씨의 일일》(1990), 《자본주의의 약속》(199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9), 《말랑말랑한 힘》(2005), 《꽃봇대》(2011),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등이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미안한 마음》,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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