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 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 수록
이 작품은 화자와 시적 대상을 교차시키는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밝혀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존재론적 비극성과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상대의 시선을 통해 밝혀지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와 '만찬' / 함민복 (1) | 2020.11.03 |
---|---|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0) | 2020.10.31 |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0) | 2020.10.27 |
그 샘 / 함민복 (0) | 2020.10.26 |
'사랑하는 까닭'과 '사랑' / 한용운 (0) | 2020.10.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