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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by 혜강(惠江) 2020. 10. 30.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 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화자와 시적 대상을 교차시키는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밝혀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존재론적 비극성과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2연으로 된 이 시는 두 연을 대칭적으로 구성하여 두 개의 시선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입장이 아닌 상대의 관점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점과 아울러 공간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두 관점을 배치시킨 점이 독특하다. 상대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자신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시는 두 화자가 존재하는 독특한 구성으로, 화자와 시적 대상이 1연과 2연에서 그 역할을 바꾼다는 점에서 참신한 발상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1연의 화자는 ‘사내’, 2연의 화자는 ‘파리’로 서로의 잠버릇을 관찰하며, 사내와 파리가 서로 상대를 지켜보며 자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1연은 사내의 시선으로 바라본 파리의 잠버릇을 묘사하고 있다.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고 진술한다. 1연의 화자인 ‘사내’가 덮고 자는 공간(천장)이 파리에게는 바닥이다. 구더기였던 파리는 날개에 대한 이상을 품었기에 높은 곳에 매달려 잠을 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추락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에 사내에게 파리는 슬퍼 보인다.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여기서 파리가 잠드는 ‘높은 곳’은 위태롭기는 하지만 파리가 지향하는 삶의 공간인데,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고 한다. 이것은 구더기였던 시절에 높은 것에 대한 동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감정이입하여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고 한다. 파리는 숙명적으로 천장에 매달려 잠자야 하는 처량하고 위태로운 존재이기에 화자에게는 슬프게 보이는 것이다.

 

  2연에서는 관찰자가 바뀌어 파리의 시선으로 사내의 잠버릇을 관찰한다. ‘나(파리)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파리는 자신이 매달린 천장을 바닥이라 생각하고, 사내는 천장에 매달린 격이다. 자세가 역전된 것이다. 그러기에 날개도 없이 중력만 믿고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자는 사내가 슬퍼 보인다. 게다가 어떤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거는 모습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감정이입의 표현). 마지막 행에서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라는 시구는 사내 한 사람이 아닌, 인간의 실존적 외로움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렇듯, 상대의 시선을 통해 밝혀지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자 함민복(咸敏復, 1962 ~ )

 

   시인. 충청북도 충주 출생. 1988년 〈성선설〉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들을 따뜻하고 진솔한 언어로 끌어안는 서정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우울 씨의 일일》(1990), 《자본주의의 약속》(199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9), 《말랑말랑한 힘》(2005), 《꽃봇대》(2011),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등이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눈물은 왜 짠가》(2003), 《미안한 마음》(2006),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2009)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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