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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인문평론》(1939. 10) 수록 ◎시어 풀이 *도래샘 : 도랑가에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북.. 2020. 8. 14.
하늘만 곱구나 / 이용악 하늘만 곱구나 - 이용악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구려 혹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널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 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 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 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 2020. 8. 14.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嶺)*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시집 《분수령》.. 2020. 8. 13.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 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 2020. 8. 13.
어둠에 젖어 / 이용악 어둠에 젖어 - 이용악 마음은 피어 포기포기 어둠에 젖어 이 밤 호올로 타는 촛불을 거느리고 어느 벌판에로 가리 어른거리는 모습마다 검은 머리 향그러이 검은 머리 가슴을 덮고 숨고 마는데 병들어 벗도 없는 고을에 눈은 내리고 멀리서 철길이 운다. - 시집 《오랑캐꽃》(194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타향에서 혼자 병들어 깊은 밤에 그리움에 젖어 있는 화자의 외로운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고향을 떠나 고독한 처지의 화자가 홀로 밤에 촛불을 밝히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며 자신의 서러운 감정을 절제된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눈 내리는 밤에 외로움을 느끼다가 아른거리는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리고 벗도 없는 타향에서 병든 몸으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화자의 정서는 ‘마.. 2020. 8. 13.
<다리 위에서>와 <달 있는 제사> / 이용악 와 - 이용악 시 와 는 이용악(李庸岳, 1914~1971)의 작품이다. 두 작품은 1947년 아문각에서 출판한 그의 세 번째 시집 《오랑캐꽃》에 수록되어 있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한 그는 처음에는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고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발표했고, 이어 만주 등지를 유랑하는 한민족의 피폐한 삶을 탁월한 시어로 형상화한 작품을 많아 썼다. 이 두 작품은 후자에 해당한다. A. 다리 위에서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어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 2020. 8. 12.
낡은 집 / 이용악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 물려 줄 은동곳* 산호 관자*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燈)*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 2020. 8. 11.
그리움 / 이용악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협동》 (1947) 수록 ◎시어 풀이 *백무선(白茂線) : 함경북도 백암에서 두만강의 삼림 지대를 가로질러 무산을 잇는 철도. *연달린 : 끊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이해와 감상 1947년 2월 《협동》에 발표된 작품으로 이용악의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1949)에 수록되어 있다. 이용악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연가풍의 작품이다. 광복 직후 홀로 상.. 2020. 8. 11.
마음의 고향 6 – 초설(初雪) / 이시영 마음의 고향 6 – 초설(初雪) -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 마을의 노오란 초가을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 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 2020. 8. 10.
공사장 끝에 / 이시영 공사장 끝에 - 이시영 "지금 부숴 버릴까" "안돼, 오늘 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 "안돼, 오늘 밤은 오늘 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 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 《바람 속으로》(1986) 수록 ◎시어 풀이 *루핑 집 : 아스팔트 찌꺼기로 코팅한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만들어 얹은 집. *칠흑 : 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있음. 또는 그런 빛깔.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산업화 · 도시화의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철거민의 비참한 삶과 이러한 폭력을 가해야 하는 철거반 인부의 상황을 극적 구성.. 2020. 8. 10.
이 사진 앞에서 / 이승하 이 사진 앞에서 - 이승하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TIME』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 ◎시어 풀이 *호의호식(好衣好食) :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음. *오체투지(五體投地) : 절하는 법의 하나. 먼저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 2020. 8. 10.
귀로 쓴 시 / 이승은 귀로 쓴 시 - 이승은 햇살의 고요 속에선 ㅉㅉㅉ, 소리가 나고 바람은 쥐가 쏠 듯 ㅅㅅㅅ, 문틈을 넘고 후두엽 외진 간이역 녹슨 기차 바퀴 소리 - 시집 《시간의 안부를 묻다》(2003)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조 작품은 참신한 발상을 바탕으로 귀로 감지한 독특한 소리의 이미지와 화자의 외로운 정서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청각적 심상과 섬세한 언어의 결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묘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조는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인 《시간의 안부를 묻다》에 실려 있다. 3장 6구로 이루어진 평시조이지만, 청각을 활용한 감각적인 표현이 현대 시의 그것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말의 결과 어감을 살린 언어에 대한 감각은 매우 .. 2020. 8. 9.
결빙(結氷)의 아버지 / 이수익 결빙(結氷)의 아버지 -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 2020. 8. 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은 다치면서라도 소리 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 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 못하고,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 2020. 8. 8.
단오(端午) / 이수익 단오(端午) - 이수익 음(陰) 오월에도 초닷새 수릿날*엔 아내여, 그대는 춘향이가 되라. 그러면 나는 먼 숲에 숨어들어 그대를 바라보는 이 도령이 되리라. 창포*를 물에 풀어 머리를 감고 그대는 열일곱, 그 나이쯤이 되어 버들가지엔 두 가닥 그넷줄을 매어 그대 그리움을 힘껏 밟아 하늘로 오르면, 나도 오늘 밤엔 그대에게 오래도록 긴 긴 편지를 쓰리라. 하늘로 솟구쳤다 초여름 서늘한 흰 구름만 보고 숨어 섰던 날 보지 못한 그대의 안타까움을 내가 아노라고…… 그대 잠든 꿈길 위에 부치리라. 시집 《단순한 기쁨》(1986) 소록 ◎시어 풀이 *수릿날 : 단오(端午),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5월 5일로 그네뛰기·씨름 등을 함. 단양(端陽). 수릿날. 중오절(重午節). *창포(菖蒲) : 천남성과의 여러.. 2020. 8. 8.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 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200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치열한.. 2020. 8. 7.
가정(家庭) / 이상 가정(家庭) - 이상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대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 《카톨릭청년》(1936) 수록 ◎시어 풀이 *제웅 :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의 액막이나, 무당이 앓는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거짓 장사를 지내는 데 씀) ▲이해와 감.. 2020. 8. 7.
야시(夜市) / 이병기 야시(夜市) - 이병기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 쓴 이, 벙거지* 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다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절은 굴비, 무른 과일, 푸른 푸성귀부터 시든 푸성귀까지. “십 전, 이십 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 해 전 조그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 2020. 8. 6.
송별(送別) / 이병기 송별(送別) - 이병기 재* 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이다 촛불을 다시 혀고* 잔 들고 마주 앉아 이야기 끝이 못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 눈이 도로 얼고 산머리 달은 진다 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 밤의 정이 십 리가 못 되는 길도 백 리도곤* 멀어라 - 《가람 시조집》(1939) 수록 ◎시어 풀이 *재 :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혀고 : ‘켜고’의 옛말. *도곤 : 비교격 조사 ‘보다’의 옛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보다는 배경과 상황 묘사를 통해 이별의 서러움과 아쉬움을 드러낸 작품이다. 시조의 특성인 절제미와 압축미가 잘 드러나 있고, 이별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서러운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화자의 정서에 조.. 2020. 8. 6.
박연 폭포(朴淵瀑布) / 이병기 박연 폭포(朴淵瀑布) - 이병기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朴淵)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긏지* 아니하도다 - 《가람 시조집》(1939) 수록 ◎시어 풀이 *박연 폭포(朴淵瀑布) :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폭포로 금강산의 구룡 폭포, 설악산의 대승 폭포와 함께 경관이 뛰어나 우리나라의 삼폭(三瀑)이라 일컬어지는 절경. *산인(山人) :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서 은거하는 사람. *봉머리 : 산의 봉우리. *메이고 : 메워지고. 뚫려.. 2020. 8. 6.
푸른 곰팡이 – 산책시 1 / 이문재 푸른 곰팡이 – 산책시 1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시집 《제국호텔》(2004) 수록 ▲이해와 감상 곰팡이는 음식을 부패하게 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지만, 한편으로는 음식물을 발효시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시인은 사랑이 성숙하는 시간을 곰팡이가 발표되는 시간에 빗대어, 사랑이 기다림을 통하여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을 말하고.. 2020. 8. 5.
기념 식수 / 이문재 기념 식수 -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데르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 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갓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2020. 8. 5.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 이문재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 이문재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 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나무 불꽃 나무들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 - 시집 《제국 호텔》(200.. 2020. 8. 4.
산성눈 내리네 / 이문재 산성눈 내리네 - 이문재 ​ 산성눈* 내린다 12월 썩은 구름들 아래 병실 밖의 아이들이 놀다 간다 성가*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 ​ 그러고 보면 땅이나 하늘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 산성눈 한 뼘이나 쌓인다 폭설이다 당분간은 두절*이다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에 그렇다.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여 내 몸과 마음의 서까래* 몇 개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쓰러져 숨 쉬다 보면 실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 자연은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 시집 《산책 시편》(1993) 수록 ◎시어 풀이 *산성(酸性.. 2020. 8. 4.
소나기 / 이면우 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 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시집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2002) 수록 ◎시어 풀이 *어푸어푸 : ① 얼굴이나 몸에 물을 끼얹으면서 내는 소리. ② 물에 빠져서 괴롭게 물을 켜며 내는 소리. 또는 그 모양. *레그혼(leghorn) : 닭의 한 품종. 대표적인 난용종(卵用種)임. 볏은 붉고 몸빛은 갈색·백색·흑색 등인데,.. 2020. 8. 3.
개밥풀 / 이동순 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맵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라 볏집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집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 2020. 8. 2.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 양반! 저 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시요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착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시집 《귀가 서럽다》(2010) 수록 ◎시어 풀이 *쪼깐 : ’조금‘의 방언 *어칳게 : ’어떻게‘의 방언. *그란다요 : ’그러십니까?‘ 의 방언. *물팍 : ‘무르팍’의 준말, ‘무릎’의 속어 *애리다 : ‘아리다’의 방언. 다친 살이 찌르듯이 아프다. *그라재 : ‘그러지’의 방언. *쓰잘데기 : ‘쓸데’의 방언(전남) *저번착 : ‘저번’의 방언 *미쳤능갑소 : ‘미쳤나보네요’의 방언 *어둡.. 2020. 8. 2.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 이기철 ​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2020. 8. 1.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시어 풀이 *미련(未練) : 깨끗이 잊지 못하.. 2020. 8. 1.
따뜻한 책 / 이기철 따뜻한 책 - 이기철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 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 시집 《가장 따뜻한 책》(2005) 수록 ◎시어 풀이 *행간(行間) : ① 글의 줄과 줄 사이. 행과 행 사이. ② (비유적으로) 글을 통하.. 2020.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