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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by 혜강(惠江) 2020. 8. 1.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시어 풀이

*미련(未練) :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여울 :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른 곳.

*때까치 : 때까칫과의 새. 숲·평원 등에 삶. 까치보다 좀 작은데, 머리는 적갈색, 배 아래는 감람색, 날개는 흑색이며 부리가 날카롭고 성질이 사나움. 잡은 먹이는 나뭇가지에 꿰어 놓는 습성이 있음.

*야성(野性) :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

 

▲이해와 감상

  <청산행>은 이기철 시인을 시단과 독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두 번째 시집 표제작이기도 하다. 이 시는 속세를 떠나 청산에 들어온 화자가 점점 청산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화자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고, 청산에서 인가(人家)를 내려다보며 과거의 삶과 의식을 반성하고 자연에 동화되고자 한다.

  시선(視線)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는 이 시는 인간 세상(속세)과 청산이라는 공간의 대비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즉 ‘인가’, ‘쓰다 둔 편지 구절’, ‘버린 칫솔’, ‘산 아래 서쪽 마을’ 등 인간 세상을 뜻하는 시구와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의 청산을 상징하는 시어의 대비를 통하여 화자는 자연과 속세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결국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

  1~3행은 속세를 떠나 청산으로 온 화자가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라고 한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고, 청산으로 들어온 것을 흡족해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맑고 깨끗한 청산에 오면,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이’듯, 희미하게 보이던 예전 청산에 살던 삶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4~5행에서 화자는 ‘청산’과 대비되는 ‘인가’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속세와 관련된 시어로, 속세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6~9행에서 화자는 청산과 속세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자연 그대로 두어 인위를 가하지 않은 무위(無爲)로운 자연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은 청산과 속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순화된 때까치들의 모습을 그려 청산에서 내려다본 속세의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10~14행은 지난날에 대한 반추(회고)를 통하여 세상사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고 있다. 속세에 대한 미련으로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는’ 화자는 ‘서른 번 다져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을 거론하며 고뇌했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떠올리고,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처럼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 세속적인 고민을 해야하는 속세의 삶을 드러내는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세상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

  15~18행에서는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자연에 동화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생목 울타리’, ‘들거미줄’은 청산(자연)의 존재이며, ‘맨발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라는 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은 세속의 삶을 경험하지 않은 순결한 청산(자연)의 존재로서 이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라는 것은 청산(자연)에 동화되고 싶어 하는 화자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각박하게 시달리다 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건 자율신경이 의지와 상관없이 치러내는 반사작용일 것이다. 그 고향이 산 첩첩 물 골골 ‘청산’이었을 때, 그를 키워준 자연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절절할 것이다. 이 시는 멀리 떠난 자리에서 청산을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직접 청산에 들어와서 ‘청산’과 세속적인 ‘세상살이’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청산’(자연)에 동화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작자 이기철(李起哲,1943~ )

  시인,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 드이 추천돠어 등단했다.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소지식인의 자의식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보여주고, 특히 《청산행》에서는 억압적 도시 문명의 기반에서 벗어난, 청산을 향한 시인의 그리움을 주로 노래했다. 이처럼 고향 회귀 의식은 그의 가장 중요한 시적 주제가 되었다.

  시집으로 《낱말 추적》(1974), 《청산행(靑山行)》(1982), 《전쟁과 평화》(1985), 《우수의 이불을 덮고》(1988),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1989),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1993), 《열하를 향하여》(1995), 《유리의 나날》(1998),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2000) 등이 있고, 장편소설 《리다에서 만난 사람》, 비평집 《시를 찾아서》,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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