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이기철 시인의 열 번째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2000년, 민음사)의 표제작으로, 자연과의 높은 친화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노래하는 것은 자칫 상투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이기철 시인의 시는 이러한 상투성을 밀어내고 시를 생기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연에서 벗어난 삶이 환경 파괴라는 위협적인 형태로 다가오는 오늘날 특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기철 시인의 경우, 자연의 의미는 풍물의 구체적인 시적 포착보다는 그것이 암시하는 삶의 방식, 그것의 도덕적 교훈에 비중을 둔 것이 많은 듯 보인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좋고, 사람들이 꾸려가는 삶이 거룩해 보인다. 이기철 시인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며, 이는 표제작인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에서 세상에 보내는 따뜻한 시로 집약된다. 다음은 이 시에 대한 시인들의 평가를 옮겨본다.
◎신지혜 시인 / 문화저널 21( 2007.11.19)
이 시처럼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라고 낮게 발음해 보라. 따스하게 번지는 강물을 만나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이 두려웠던가.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을 생각해 보라. 이별마저도 완성하고 순응할 수 있는 빛나는 삶의 예지. 삶을 초연히 건너가며 기쁨과 아름다움을 응시할 수 있는 투명한 눈동자를 지녀 보라 한다. 그 명상적이고 자성적인 시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두현 시인 / 한국경제 문화부장 / 한국경제(2011.9.4)
사흘 뒤면 벌써 백로(白露).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히는 절기입니다. 시인은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대문을 두드리기 전에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며 우리 마음의 대문을 먼저 두드립니다. 아,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과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은 가을 초입.
◎권주열 시인 / 경상일보(2013.11.11)
늦가을인데 남녘지방에는 아직도 단풍이 곱다. 보도블럭 위에 여기저기 떨어진 은행잎을 보면서 첫 행의 ‘잎 넓은 저녁’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환한 아침과 밝은 대낮 보다 모서리가 점점 넓고 부드러워지다가 마침내 모서리조차 허물어지는 저녁의 그 넉넉함이 참 좋다.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고 ‘꽃잎의 말’로 하루를 마감하고 싶지만, 일상은 늘 실수투성이고 옳고 그름의 테두리 속에 언쟁을 높이고 각박하다. 시를 따라가다 보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짧은지 알 것 같고,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는지도 알 것 같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에 무심했다. 시의 행간에 기대 낮고 겸허하게 뒤돌아보면 어느새 무른 눈빛을 한 채 고향에 당도할 것 같다. 한없이 순한 마음을 안고 평안에 당도할 것 같다.
◎반칠환 시인 / 서울경제(2016.4.5)
당신이 읽은 책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당신의 독법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만난 사람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당신이 아름답게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 돌아온 저녁을 위해 더 따뜻해야 했고, 초승달 걸린 밤하늘 한갓지게 내다보기 위해 하루 일과를 성실히 마쳐야 했을 것이다. 당신은 삶을 사랑하지만 이별을 완성이라 여긴다. 모두 꽃의 만개에 환호할 때, 당신은 허공을 딛는 낙화의 발을 본다. 내가 만난 세상이 모두 아름다웠다면 나 또한 아름다운 자이다.
◎문현미 시인 / 기독교 한국신문(2017.10,25)
좋은 시가 있으면 잘 쓴 시도 있다. 이런 분류 기준은 주관적이긴 하지만 좋은 시는 울림이 있다. 좋은 시는 읽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훈훈한 기운을 그득하게 한다. 화려한 문학적 기교가 없어도 된다. 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비유가 없어도 된다.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 인간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으로 인해 독자의 심금에 가 닿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불신과 갈등이 산재해 있다. 세대간, 계층간, 동서간, 이웃간, 가족간 서로 포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문명은 발달하는데 인간성은 갈수록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류에 대해 여러 모로 의견을 나누고 방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 청나라 때 시인 원매는 시를 읽으면 운명이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시의 효용 가치에 대해 언급한 것인데 시가 어떤 힘이 있어서 그럴까. 시집 한 권이 커피 두 잔 값에도 못 미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말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언어에 대한 본질 규명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시인은 그런 언어를 재료로 최대의 가치를 창출하는 탁월한 창조 능력을 지닌 예술가이다. 어떻게 저녁의 잎이 넓을 수 있는가. 이 시는 초입에서부터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표현한다. 그러면 따뜻해지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하는가.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으면 된다고 한다. 또 “희고 깨끗한 발”도 필요하고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손과 발 그리고 말을 쓰려면 그전에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녀야 함을 알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시의 말미에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고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고 한다. 세상 부대끼며 살면서 좋은 사람만 만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긍정적 자세로 바라보면 비록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 있다.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조가 참 아름답고 풍요롭다.
좋은 시는 복잡한 미학적 장치를 두지 않고도 탄생한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시선으로 세상에 대한 온기를 이토록 잘 전할 수 있을까. 도공이 혼과 심미안을 담아 물레질을 하듯 언어를 빚어 내는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능숙하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의 소리를 들으며 미워했던 누군가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쓰고 싶은 가을날이다.
▲작자 이기철(李起哲,1943~ )
시인,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 등이 추천돠어 등단했다.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 자기 성찰과 참회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낱말 추적》(1974), 《청산행(靑山行)》(1982), 《전쟁과 평화》(1985), 《우수의 이불을 덮고》(1988),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1989),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1993), 《열하를 향하여》(1995), 《유리의 나날》(1998),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2000), 《가장 따뜻한 책》(2005), 《나무, 나의 모국어》(2012), 《꽃들의 화장시간》(2014), 《흰 꽃 만지는 시간》(2017) 등이 있다. 그리고, 장편소설 《리다에서 만난 사람》, 비평집 《시를 찾아서》,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 등이 있다.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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