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맵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라
볏집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집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 시집 《개밥풀》(1980) 수록
◎시어 풀이
*논귀 : 논의 귀퉁이.
*무논 : 물이 늘 괴어 있는 논.
*함성(喊聲) : 여럿이 크게 지르는 고함 소리.
*전복(顚覆) : 뒤집혀 엎어짐. 또는 뒤집어엎음.
*장강(長江) : 길고 큰 강.
◎개밥풀(개구리밥 풀)
개구리밥 풀을 이르는 말. 개구리밥 과에 속하는 일년생 부유성 수생식물. 물 위에 떠다니며 자라서 부평초라고도 한다. 개구리밥이라는 이름은 개구리가 많이 사는 연못이나 논에 사는 생활습성에서 얻어진 것이다. 가을에 모체에서 생긴 타원형의 작은 겨울눈이 물속에 가라앉아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물 위로 나와 번식한다.
▲이해와 감상
이동순 시인의 첫 시집 《개밥풀》(1980)의 표제작으로, 이 시는 개구리밥으로 잘 알려진 ‘부평초’의 모습을 통해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의 ‘개밥풀’은 단순한 풀이 아니라, ‘민초’를 의미한다. 민중이 비록 약자일지는 모르나 김수영의 ‘풀’이 그러했듯 이 시에서도 ‘개밥풀’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며, 이성부의 ‘벼’에서와 같이 서로 연대할 줄 아는 존재이다.
‘개밥풀’을 의인화하여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이 시는 ‘개밥풀’의 한해살이를 계절의 흐름에 따라 표현하여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한다. 그리고 전반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개밥풀이란 수생식물의 생태를 묘사하고, 후반부에 들면 관찰자의 관찰에 응답이라도 하듯, ‘개밥풀’ 자신의 목소리로 한 떼의 여리고 작은 이파리들의 헌신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1~10행에서는 개밥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시각에서 개밥풀이 ‘실눈을 뜨고 논귀에 쿵쿵거리며’ 물밑에 발끝이 닿지 않고, 미풍에도 저들끼리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리저리 휩쓸리는 억압받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1~15행에서 화자는 ‘개밥풀’과 하나가 되어, ‘우리’가 된다. 거리를 두고 민중을 지켜보던 화자가 시적 대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앞부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묘사된 ‘개밥풀’은 약한 존재였지만, 이후로는 서로 연대하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이것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완벽하게 일체가 됨으로써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긴밀한 유대와 삶의 동일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수확을 위하여 ‘몸을 함부로 버리며’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는 모습을 통하여 자유를 위한 희생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6~28행에서는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통 속에서도 버티는 개밥풀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큰비’, ‘장강의 소용돌이’, ‘자욱한 볏짚’, ‘추풍’ 등 온갖 외압과 시련에 시달리며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라고 한다. 이것은 억압과 멸시 속에 살면서도 흩어지지 않는 연대 의식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마지막 29~31행에서 화자는 개밥풀의 시각에서 겨울을 맞아 견디는 모든 시련이 ‘봄의 번성’을 위한 ‘개밥풀’의 헌신임을 노래하고 있다. 봄의 번성을 위하여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어 인내하며, 다가올 ‘봄의 번성을’ 기다릴 줄 아는 개밥풀의 모습은 곧 민중의 자유를 위한 희생의 기다림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삶의 뿌리가 없이 떠도는 고통 속에서도 민중들이 서로 연대하여 자유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시인.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0년 첫시집 《개밥풀》 간행 후 《물의 노래》(1983), 《지금 그리운 사람은》(1986), 《맨드라미의 하늘》(1988), 《철조망 조국》(1991),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1995), 《봄의 설법》(1995), 《꿈에 오신 그대》, 《가시연꽃》(1999),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미스 사이공》, 《마음의 사막》, 《발견의 기쁨》, 《묵호》, 《멍게 먹는 법》(2016), 《마음 올래》(2017), 《좀비에 관한 연구》(2019), 《독도의 푸른밤》(2020) 등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을 발간하였다. 시선집 《맨드라미의 하늘》, 《그대가 별이라면》, 《숲의 정신》 등을 발간하였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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