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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산성눈 내리네 / 이문재

by 혜강(惠江) 2020. 8. 4.

 

 

 

산성눈 내리네

 

 

- 이문재

 

산성눈* 내린다

12월 썩은 구름들 아래

병실 밖의 아이들이 놀다 간다

성가*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

그러고 보면 땅이나 하늘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

산성눈 한 뼘이나 쌓인다 폭설이다

당분간은 두절*이다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에

그렇다.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여

내 몸과 마음의 서까래*

몇 개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쓰러져 숨 쉬다 보면

실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

자연은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 시집 《산책 시편》(1993) 수록

 

 

◎시어 풀이

 

*산성(酸性)눈 : 대기오염으로 고농도의 황산과 질산이 포함되어 내리는 눈.

*성가(聖歌) : 기독교에서 신을 찬양하는 신성한 노래.

*두절(杜絕) : 교통이나 통신 따위가 막히거나 끊어짐.

*서까래 : 집의 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산성눈’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온 세상을 덮은 산성눈을 통해 산업화한 현실과 자연의 파괴로 환경 오염을 초래한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문명 중심적 사고를 지닌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산성눈’은 오염된 대기의 초미세먼지와 뒤섞여 중금속이 다량 함유되면서 성질이 산성으로 변하게 된 눈이다. ‘산성눈’을 맞으면 호흡기질환, 내장질환, 탈모 등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고, 초목을 고사시켜 대지를 사막화한다. 이 시에서 아름다운 함박눈이 ‘산성눈’이라는 화자의 인식은 작품 전체에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산성’은 인간 혹은 물질문명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인한 자연의 보복을 상징한다.

 

  이 시는 자연물인 ‘눈’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을 의인화하여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으며, ‘내린다’, ‘내려앉는다’ 등 하강(下降)의 이미지와 ‘지워지고’, ‘무너지는’ 등 소멸(消滅)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시어를 통해 암울한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1연은 산성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병실 밖의 아이들이 놀다 가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노래도 지워지고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12월 ‘썩은 구름’ 아래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고 착각할 만큼 ‘하얗게’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썩은 구름’은 환경 오염으로 더러워진 구름을 의미한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에서 ‘캄캄하고 고요하다’라는 표현은 흰 눈이 온 세상을 가득 덮은 상황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산성눈으로 인한 암울함과 적막함을 드러낸 것이다.

 

  2연에서는 무분별한 산업화가 산성눈을 초래했음을 밝히고 그로 인한 자연과 인간의 파괴에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첫 부분에서 화자는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라며, 산성눈이 내리는 것을 환경 오염에 대한 자연의 보복으로 여긴다. 이러한 산성눈이 ‘한 뼘이나’ 쌓인다는 것은 부정적 현실의 깊이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쌓인 폭설로 ‘당분간은 두절이다.’라고 한 것은 결국, 자연의 보복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원만한 관계가 단절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원인이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 ‘무서운 속도’로 표상되고 있는 현대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자연 파괴에 대응하여 자연이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로 인간은 몸과 마음을 지탱해주던 힘을 잃고 절망한다. ‘실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라고 한다. 이것은 산업화의 잔재와 같은 폐해들이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의미이며, 산성눈 펑펑 내리듯 자연은 인간에게 거침없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화자는 산성눈이 내리는 것을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죄, 탐욕의 죄, 산업화만 추구하다 자연과 인간의 원만한 관계마저 파괴한 죄 때문에 ‘산성눈’이 내리는 것을 하늘이 무너지는 것에 비유하여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자연은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로 자연의 보복을 경고하며, 더 늦기 전에 인간으로서 환경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고 행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이 시는 환경 오염으로 내리는 ‘산성눈’을 통해 산업화 사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 주고, 심각해진 생태계 파괴상을 고발하는 점에서 생태 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작자 이문재(李文宰, 1959~ )

 

 

  시인.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튼튼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 세계를 부유하는 젊은 혼의 이미지를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1988), 《산책 시편》(1993), 《마음의 오지》(1999), 《제국호텔》(2004), 《공간 가득 찬란하게》(200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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