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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기념 식수 / 이문재

by 혜강(惠江) 2020. 8. 5.

 

 

 

기념 식수

 

 

-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데르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 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갓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 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 철 흘러넘치는 구릉 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로 흔들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 시집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1988) 수록

 

 

◎시어 풀이

 

*천정 : ‘천장’(건물 내부에서 보이는 지붕의 안쪽 부분)의 잘못된 말.
*교외선 : 도시와 도시의 주변을 연결하는 철도.
*갈피 :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
*한살이 : 일생.
*은수원사시나무 : 계곡이나 산기슭 아래에서 잘 자라는 교목.
*구릉 : 완만한 기복의 낮은 산이나 언덕이 계속되는 지형. 언덕으로 순화.

 

◎이 시에 등장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

 

  '어린 왕자의 이야기', '인어 공주 이야기', '들개의 한 살이'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죽음과 연관된 이야기들이다. 화자는 어린 왕자의 죽음, 인어 공주의 죽음, 들개의 죽음 이야기를 조카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조카들은 이 세상에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곧 맞이하게 될 엄마의 죽음에 대한 비극성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해와 감상

 

 

  누구나 가족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크나큰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시는 형수의가 죽은 상황에서 형수의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가서 기념 식수를 하는 행위를 통해서 형수의 죽음과 그 죽음에서 비롯한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이다.

 

  여기서 ‘기념 식수’는 시적 상황을 요약한 단어로서, 죽은 형수의 영혼을 위해 형수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은수원사시나무’를 심는 행위를 말한다. 형수의 영혼을 편히 보내고자 하는 일종의 제의행위(祭儀行爲)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화자의 마음과는 달리, 엄마가 죽은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이 즐겁게 나무를 심는 모습은 화자로 하여금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죽음과 소풍이라는 상반된 시적 상황을 통해 성찰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 이 시는 조카들이 어머니를 잃은 가슴 아픈 상황을 화사한 봄 소풍의 풍경과 대비시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창출하고 있으며, ‘은수원사시나무’ 등 상징적 소재를 사용하였다. 또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봄이 갖는 생명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나타내고, 죽음을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풍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슬픔을 승화시키고 있다.

 

  1~6행에서는 형수가 죽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매우 담담하게 진술하면서 시작된다. 화자인 ‘나’는 죽은 형수의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간다는 상황에서 독자들은 의아해진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감자를 구워 봄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은 교외선 유리창에 매달려 좋아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행동이지만, 형수를 잃은 화자의 비통한 심리와는 대비된다.

 

  7~11행에서 화자는 조카들과 함께 간 소풍지에서 봄날의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 준다. 햇빛이 쏟아지고 개구리가 뛰어다니던 땅에는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하늘이 출렁이고 햇빛은 굴러떨어진다. 출렁이는 하늘 ‘그 맑은 영혼의 갈피에서’ 3월의 햇빛이 굴러떨어진다는 묘사에는 3월의 풍경 속에서 형수의 영혼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독자들은 여기서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2~18행에서 화자는 감자를 구워 먹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달해야 하기에 일부러 죽음이 등장하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와 안델센이 지은 ‘인어공주’의 바다 이야기 등 동화를 들려주고,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주지만,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라며,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다고 애통해한다.


  그래서 19~23행에서 화자는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심기로 한다. ‘너의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 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이 제례 의식과도 같은 나무 심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나무는 생명의 탄생이며 부활이며 순환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생명의 순환을 기원하는 의식인 것이다. 화자와 아이들은 나무를 심음으로써 진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앞날을 살아갈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24~28행에서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도 흔들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이라는 표현으로, 화자와 함께 나무를 심은 조카들도 곧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눈물 반대쪽으로’ 노을로 이어지는 햇빛을 따라 이 나무와 함께 싱싱하게 자라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생명 순환에의 소망인 것이다.

 


▲작자 이문재(李文宰, 1959~ )

 

 

  시인.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튼튼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 세계를 부유하는 젊은 혼의 이미지를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1988), 《산책 시편》(1993), 《마음의 오지》(1999), 《제국호텔》(2004), 《공간 가득 찬란하게》(200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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