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곰팡이 – 산책시 1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시집 《제국호텔》(2004) 수록
▲이해와 감상
곰팡이는 음식을 부패하게 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지만, 한편으로는 음식물을 발효시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시인은 사랑이 성숙하는 시간을 곰팡이가 발표되는 시간에 빗대어, 사랑이 기다림을 통하여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사랑을 ‘우체국’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산책’과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우체국’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는데 필요한 여유와 기다림을 강조하기 위한 소재이다. ‘나에게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발효의 시간’은 편지 한 통을 들고 우체국을 찾아 나서고, 그 편지가 전달되고 답장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랑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값진 성숙의 기간이다. 화자는 이러한 시간을 곰팡이의 속성에 빗대고 있다. 따라서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라는 표현은 화자가 보낸 편지와 그에 대한 답장은 서로에 대해 기다림과 사랑이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했고요’의 ‘~고요’는 ‘~지요’, ‘~습니다’와 같은 고백적 어조는 이 시에서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기여하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를 깨닫고 있다. 화자인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고 난 뒤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우체국’은 편지를 쓰고 부치며 사랑을 무르익게 하는 매개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자는 사랑도 기다림, 그리움의 시간을 통해서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체통이 빨간색인 이유는 사람들에게 조급함에 대해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이것이 화자가 강조하는 ‘느림의 미학(美學)’이다.
이 시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부치고 받는 우체국을 사랑이 무르익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편지가 전달되고 답장이 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통해 성숙되는 과정을 곰팡이의 발효에 빗대어 ‘기다림을 통한 사랑의 내적 성숙’을 노래한 것이다.
▲작자 이문재(李文宰, 1959~ )
시인.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튼튼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 세계를 부유하는 젊은 혼의 이미지를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1988), 《산책 시편》(1993), 《마음의 오지》(1999), 《제국호텔》(2004), 《공간 가득 찬란하게》(200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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