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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송별(送別) / 이병기

by 혜강(惠江) 2020. 8. 6.

 

 

 

 

송별(送別)

 

 

- 이병기

 

 

 

재* 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이다

촛불을 다시 혀고* 잔 들고 마주 앉아

이야기 끝이 못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

 

눈이 도로 얼고 산머리 달은 진다

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 밤의 정이

십 리가 못 되는 길도 백 리도곤* 멀어라

 

 

- 《가람 시조집》(1939) 수록

 

 

◎시어 풀이

*재 :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혀고 : ‘켜고’의 옛말.

*도곤 : 비교격 조사 ‘보다’의 옛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보다는 배경과 상황 묘사를 통해 이별의 서러움과 아쉬움을 드러낸 작품이다. 시조의 특성인 절제미와 압축미가 잘 드러나 있고, 이별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서러운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화자의 정서에 조응(照應)하는 주변의 상황 묘사만으로 이별의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조는 두 수(首)로 이루어져 있는 연시조이다. 첫 수는 이별을 앞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시골 마을이며, 시간적 배경은 밤이다. 시골 마을의 밤의 호젓한 풍경이 작품 전체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재 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은 쓸쓸하고 외로운 화자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며, ‘촛불을 다시 혀고’에서 ‘혀고’는 ‘켜고’의 옛말로 예스러움을 드러내는 의고적(擬古的) 표현이다.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은 촛불이 다 달아 다시 켤 정도로 밤이 깊을 때까지 오래도록 술상 앞에서 술잔을 들며 이별의 정을 나누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수는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새 밤은 깊어 눈은 다시 얼었고, 달이 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녹았던 눈이 다시 얼고 산머리 달이 기울어 어둡다’는 주변 상황을 묘사한 것은 길을 떠나기 곤란한 상황을 제시한 것으로서,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ㅅ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잡은 손 뿌리치고 가는 사람을 보내는 ‘이 밤의 정’, 곧 이별을 아쉬움은 ‘십 리가 못 되는 길도 백리도곤 멀어라’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방이 떠나야 하는 여정(旅程)은 비록 ‘십 리’ 정도의 짧은 것이지만,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백 리보다도 더 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는 자’와 ‘보내는 자’ 사이의 ‘송별(送別)의 정’은 끈끈하고 아름답다. ‘혀고’, ‘볏짚은’ 등 의고형(擬古形) 표현에 나타나듯이 옛사람들의 이별이라 치부할지 모르지만, 간단히 전화나 문자로 통보하듯 쉽게 이별하는 요즘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일제 강압기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여 당시 시조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시조학의 바탕을 마련하고, 직접 많은 현대 시조를 창작하여 시조 부흥을 이끌었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작자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 시인 · 국문학자. 전북 익산 출생. 호는 가람(嘉藍). 1925년 《조선문단》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 시인으로 출발했다. 1920년대 중반 최남선, 이은상 등과 함께 시조 부흥 운동에 앞장서서 시조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노력하였다. 특히, 이병기는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고시조 재현에 그치지 않고 현대 시조의 모형을 제시하여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한 작가로 평가된다.  1932년 《동아일보》에 <시조를 혁신하자> 등 글을 연재하여 고시조와 현대 시조를 비교하며 현대 시조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고, 세련된 감각과 감수성으로 현대 시조들을 발표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되기도 하였다. 작품집으로 《가람 시조집》(1939), 《가람 문선》(196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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