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夜市)
- 이병기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 쓴 이, 벙거지* 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다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절은 굴비, 무른 과일, 푸른 푸성귀부터 시든 푸성귀까지. “십 전, 이십 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 해 전 조그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 <신민> (1927. 9) 수록
◎시어 풀이
*어슬어슬 : 날이 어두워지거나 밝아질 무렵의 조금 어둑한 모양
*벙거지 : 모자의 속어. 털로 검고 두껍게 만들어 갓처럼 쓰던 물건(군인·하인들이 썼음).
*쪽 : 부인네의 뒤통수에 땋아서 틀어 올려 비녀를 꽂는 머리털.
*어중이떠중이 : 여러 방면에서 모인 잡다한 사람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
*흥성스럽게 : 여러 사람이 활기차게 떠들며 흥겹고 떠들썩하게
*퀘퀘히 : ‘켜켜이’의 잘못
*갓망건 : 갓과 망건(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
*족두리 : 여자의 머리에 얹던 검은 관(위는 여섯 모가 지고 아래는 둥긂)
*청홍실붙이 : 결혼용품이나 바느질에 쓰는 청색 혹은 붉은색의 명주실 따위
*어릿가게 : 색실이나 바느질 도구를 파는 가게
*여중가리 :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 규범 표기는 ‘여줄가리’
*왜화(倭化)붙이 : 일본적인 분위기나 특성이 있는 물건을 낮잡아 이르는 말.
*비웃 : 물고기 ‘청어(靑魚)’
▲이해와 감상
1927년에 발표된 <야시>는 소란스러운 식민지 조선의 야시장 풍경을 통해서 민중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왜곡된 경제구조로 인해 갈수록 어려워지는 민중들의 생존 조건을 고발하고, 야시장 상인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 3장으로 된 이 사설시조는 시조의 형식을 파격적으로 변용하여 중장과 종장이 과도하게 확장되어 있다. 율격의 확장을 꾀하는 사설시조란 원래 경험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전달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서울의 야시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현대 시조 개척에 앞장선 이병기 시인은 이 작품에서 당대의 조선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생생한 느낌과 감상을 표출함으로써 시조가 당대의 현실과 경험을 반영할 수 있는 양식이라는 점을 실증해주고 있다.
초장에서는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다’라고 하면서,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싸구려’라는 장사꾼들의 목청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중장은 시장에 구경 나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의 행색, 그리고 가게의 다양한 물건들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사설시조에서 사설을 개방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이 중장이다. 여기서 사설시조의 열거와 반복, 대조와 비교, 해학과 비판이 드러난다. 먼저 시장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행색이다. 갓 쓴 사람, 벙거지 쓴 사람, 머리에 쪽을 찐 아녀자와 단발머리의 사람, 시장 거리를 오가는 이런저런 사림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런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고 간다. 그 사람 다음으로 야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열거된다. 납작한 기와집에 간판만 높이 달린 어설픈 모습이다. 진열해 놓은 물건이라고는 ‘묵은 갓망건, 족두리’처럼 한 시절 지난 물건이거나,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등 결혼이나 바느질 용품과 도구들이거나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혹은 물 건너온 싸구려 잡화들과 오래된 생선,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 등 ‘십 전 이집 전’하는 싸구려 제품이 전부이다. 이 보잘것없는 물건을 놓고, 상인들은 밤 깊도록 ‘싸구려’를 외친다. 언뜻 보면, 야시장이 활기찬 모습처럼 보이지만, 싸구려만 외치는 초라한 상인들의 모습 속에는 옹색하고 궁핍한 삶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종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종장에서는 남산 골목의 우뚝 솟은 새 집과 ‘싸구려’ 소리는 외치는 종로의 조그만 가게를 대비시킨다.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은 1920년대 서울 주거지역의 분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 후 서울의 남산 기슭에는 신사(神祠)를 짓고 그 주변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단장했다. 일본 총독이 사는 관저도 거기 세웠으며, 명동, 충무로 일대를 일본인 상업지역으로 만들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조고마한 가게들’에 불과했던 남산 골목의 집들이 우뚝 솟은 대궐 같은 집이 될 정도로 식민지 지배층으로 부가 집중되었으니, 이 골짜기에 ‘우뚝 솟은 집’이 꼴사납게 보였을 것은 분명하다.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라는 말속에는 같은 서울 장안이면서도 번창하는 일본인 구역과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이 모순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찬바람만 나면 이 궁색한 가게들도 문을 닫아야 한다.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라는 표현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한다. 당시에는 4월에서 10월까지만 야시장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난한 장사꾼들은 일터를 잃게 되고, 생계를 위해서는 찬 바람 부는 길거리로 내몰려 군밤 장사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같이 서울 장안에서 남산골과 종로가 부자와 빈자의 공간으로 구획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 현실이 만들어낸 삶의 모순 구조가 서울 장안을 그런 구조로 편 갈랐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종로 야시장 상인의 고달픈 삶을 통해 당시 가난 속에 살아가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고달프고 힘든 삶에 연민과 안타까움을 보내는 동시에 당시의 모순된 현실의 구조를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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