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
- 이문재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 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나무 불꽃 나무들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
- 시집 《제국 호텔》(2004) 수록
*광합성 : 녹색 식물이 빛 에너지를 이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수분으로 유기물을 합성하는 과정.
*교란 : 마음이나 상황 따위를 뒤흔들어서 어지럽고 혼란하게 함.
이 작품은 우리가 평범하게 보아오던 일상의 현상들을 살펴보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부자연스러운 모습과 그 속에 존재하는 우리 현실의 부정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3연 역시, 자연의 순리를 벗어난 비정상적인 상황의 지속되는 것에 염려와 불안감을 드러낸다. 화자는 겨울이 되었는데도 나무들은 켜놓은 전구들 때문에 잎 없이도 광합성을 하고,겨울나무들은 새로운 봄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빼앗긴 채 교란당하는 등, 순리를 벗어난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현실을 보면서 염려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여기서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나무 불꽃나무들’은 정상적이 아닌 상황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라고 한다. 이 ‘심상치 않다’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상황에서 과연 사람들과 나무들이 봄을 맞이하여 약동하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과 불안감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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