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下流)
- 이건청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 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 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 시집 《푸른 말들에 대한 기억》 (2004) 수록
◎시어 풀이
*삘기풀 : 띠의 어린 새순
*뜸부기 : 뜸부깃과의 여름새. 냇가·연못·풀밭에 사는 검누런 갈색, 잘 날지 못하고 ‘뜸북뜸북’ 하고 욺.
*둥치 : 큰 나무의 밑동.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하류’는 화자가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나무가 있던 공간이며, 그 나무는 화자에게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자 무한한 상상력과 희망을 주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자취 없이 소멸되자 동경과 순수한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유년 시절의 공간을 아름답고 선명하게 나타내고, ‘~았네(었네)’라는 종결어미의 반복을 통해 운율감을 형성하면서 아쉬움의 정서를 드러내고, 그리움이 가득한 회상적 목소리로 유년시절의 그리움과 소멸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1~10행에서 화자는 화자의 유년 시절, 추억 속의 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거기 나무가 있었네’라는 과거 회상의 어조를 다섯 번 반복하며 시상을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같은 구절의 반복 표현은 시에 운율감을 형성하고, 화자의 회상적 정서를 부각시킨다. 여기서 ‘거기’는 시의 제목인 '하류'를 가리키는데, 화자와는 멀리 떨어진 공간이며,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기억 속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무’는 화자의 그리움의 대상이며, 회상의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화자는 그 나무에는 ‘기러기’가 살고,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고, 집에 돌아와선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은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인 이미지로 드러낸 공감각적 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년 시절을 아름답고 선명하게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다’는 것은 나무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을 드러내는 것이다. 운율감과 아쉬움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고
11~21행에서는 그 ‘나무’가 화자에게 있어서 유년 세계의 중심이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화자가 ‘나무’가 있는 하류를 향해 잠이 들면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를 의인화하여 나무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늘‘은 보금자리, 안식처를 의미하는데, 그늘은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것은 나무의 그늘이 아이에게 무한한 상상과 희망을 준다는 의미로서, 그 나무 그늘은 아이에게 백사장과 시냇물이며, 삘기풀이요 뜸부기 알 등 아이의 상상 속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유년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22~28행에서 화자는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된 것에 상실감을 느끼고,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만 있는 모습에 쓸쓸함을 드러내어 소멸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남은 나무를 추억할 뿐이다.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는 사라져 버린 순수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 것이며,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는 마음속으로만 자리 잡고 있는 잃어버린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동심의 세계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는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나무'를 통해 그 시절의 소멸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의 화자인 '아이'에게 나무는 동경의 대상이자, 무한한 상상과 희망을 주는 놀이터였다. 그러나 나무가 무너져 흩어져 버리고 재가 돼 버린 지금, 화자는 유년 시절과 같은 순수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작자 이건청(1942~ )
시인, 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목선들의 뱃머리>로, 1968년 《현대문학》에 <손금>, <구시가의 밤>, <구약>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1970), 《목마른 자는 잠들고》(1975), 《망초꽃 하나》(1983), 《하이에나》(1989), 《청동시대를 위하여》(1989), 《코뿔소를 찾아서》(1995),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2000),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2005),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2006),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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