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석류(石榴) / 이가림
by 혜강(惠江)
2020. 7. 31.
석류(石榴)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 시집 《순간의 거울》(1995) 수록
◎시어 풀이
*잉걸불 : 이글이글 핀 숯불. 불잉걸. 혹은 다 타지 않은 장작불.
*심연(深淵) : ① 깊은 못. 심담. ②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깊은 구렁.
*충만(充滿) : 가득하게 차 있음.
*홍보석(紅寶石) : 루비(ruby)
▲이해와 감상
석류알을 보면 영롱하고 아름답다. 흡사 붉은 보석알과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석류알 같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화자인 ‘나’는 붉게 익은 석류를 바라보며 열병과 같이 타오르는 사랑과 외롭고 애달픈 사랑의 속성을 석류알이 익어 터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빗대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석류’는 그리운 대상에 대한 시적 화자의 사랑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꽉 찬 석류알이 껍질을 부수고 터져 나오는 모습은 그리운 사람에 대한 사라의 감정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해 사랑을 고백하는 화자의 모습과 대응한다.
색채 중심의 시각적 심상을 활용한 이 시는 사랑의 속앓이를 석류라는 소재에 대응시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비유법을 통해 의미를 형상화하고, 영탄법과 과장법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는 가슴 속에 이글거리는 그리움을 노래한다. 화자는 가슴에 타오르는 그리움을 이글거리는 장작불인 ‘잉걸불’에 비유하여 삭막하기 그지없는 ‘텅 빈 가슴’에 타오르는 것으로 묘사한다.
2연은 사랑의 열병을 ‘여름 내내 앓던 몸살’에 비유하여 더 이상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노래한다. 여기서 ‘캄캄한 골방’은 석류 껍질 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랑을 겉으로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화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심정은 3연에서 더욱더 깊어져 간다.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는 그리운 대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이며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처럼 사랑의 감정은 더욱 커져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할 정도라고 한다.
그리하여 4연에서는 그동안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사랑이 익을 대로 익은 사랑의 ‘어지러운 충만’이 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은 들끓고 어지러운 화자의 마음과 색채적으로 대비되고 있는데,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며, ‘어지러운 충만’은 사랑이 성숙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과정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껍질을 부수듯’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로 한다.
마지막 5연은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라며, 사랑을 고백하며 받아주기를 간청한다. 제 살 찢고 툭툭 벌어지는 석류가 지구가 빠개지는 것보다 더 격한 사랑으로 쏟아진다. 이것은 석류가 터지는 모습으로 사랑의 감정이 성숙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홍보석’은 영롱한 석류알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홀로 사랑의 열병을 앓아 사랑의 고독과 아픔이 내재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정리하면, 이 시는 고독의 극점에서 뜨거운 사랑이 싹트고, 사랑의 극점에서 찬란한 슬픔이 탄생한다는 것을 '석류'를 통해 생생하게 형상화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단단한 껍질 속에 알알이 들어 있는 '석류'의 붉은 열매를 들끓는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으로 표현하고, 이를 다시 '잉걸불',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 '어지러운 충만', '홍보석의 슬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내어 사랑이 생성하여 소멸하는 과정을 나타냈다. 그런데 고독이 극점에 달하는 '텅 빈 가슴속', '캄캄한 골방'에서는 사랑의 마음이 들끓고, 반대로 사랑하는 대상인 '그대의 뜰' 안에서는 오히려 슬픔이 깨진다는 표현에서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작자 이가림(李嘉林, 1943~2015)
시인. 만주 출생, 정읍에서 성장.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조화된 삶의 붕괴와 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집에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별》 등이 있다. 수필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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