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의 밤
- 윤성택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 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 《현대시학》(2002년 1월호) 수록
◎시어 풀이
*미로(迷路) : 어지럽게 갈래가 져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
*이정표(里程標) : ① 도로나 선로 등의 길가에 거리 및 방향을 적어 세운 표지. 거리표. ② 어떤 일이나 목적의 기준.
*촉(燭) : ‘촉광(燭光)’의 준말. 예전에 쓰던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 현재는 칸델라(candela)를 사용하며, 1촉광은 약 1칸델라임.
*전구(電球) : 전류를 통해 빛을 내는 기구. 전등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추운 겨울 ‘산동네의 밤’ 풍경을 관찰한 화자가 가난하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이웃과의 유대감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산동네의 삶에 대한 연민의 정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산동네 풍정(風情)을 섬세하고 진솔하게 묘사,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화자의 시선(視線)에 따라서 ‘판자촌(웅크린 채 서로 맞대고 있는 집들)→구멍가게→(밤하늘의) 별들’로 이동하면서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촉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적 대상에 대한 화자의 새로운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1~7행에서는 화자가 ‘나’가 산동네의 밤 풍경을 관찰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웅크린 채 서로 맞대고 있는 집들’, 좁은 산동네의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바람을 차고 오르내리는 걷지 않은 ‘빨래’ 들,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열악한 산동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에서 ‘춥다’와 대조되는 ‘불씨’를 통하여 화자는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있다. ‘웅크린 채 서로 맞대고 있는 집들’은 산동네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8~14행에서 희망의 ‘불씨’를 본 화자는 산동네 사람이 되어 산동네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앞에서 ‘산동네의 밤’ 정경을 관찰하던 화자는 산동네에서 행동을 한다.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산다.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은 열악한 산동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는 구멍가게가 동네에서 거리나 방향을 가르쳐 주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주를 샀다’는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와 연결하여 화자의 시적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화자의 시적 중심은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에 있다. 이것은 열악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이라도 희망을 주고 싶어 하는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화자는 산동네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이런 연민을 지닌 화자는 15~16행에서 어두운 방안에 불을 밝히기 위해 전등의 스위치를 찾으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 인식하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화자는 17행 이하에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따스하게 안겨 오는 환한 불빛’(촉각적 이미지) 아래서 화자는 ‘수수꽃처럼’ 웃으며,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온 하늘의 ‘별들’까지 끌어들여 산동네 마을 사람과 자신, 그리고 ‘별들’이 연대감으로 하나가 된, 한 폭의 아름다운 ‘희망’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끝까지 읽다 보면, 산동네에 정감을 느끼고 있는 화자처럼 나 자신도 ‘따스하게 안겨 오는 환한 불빛 아래/ 수수꽃처럼 서서 웃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추움'과 불씨의 '따뜻함'이 대조를 이루며 가난한 삶의 고달픔과 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연민의 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따뜻한 작품이다.
▲작자 윤성택 (1972~ )
시인.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수배전단> 외 2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리트머스》(2006), 《감(感)에 관한 사담들》(2013), 산문집으로 《그 사람 건너기》(2013), 《마음을 건네다》(2017)가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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