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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구두 / 송찬호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 2020. 6. 22.
여승 / 송수권 여승(女僧)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2020. 6. 21.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 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 2020. 6. 21.
세한도(歲寒圖) / 송수권 세한도(歲寒圖) - 송수권 먹 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 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 먹 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 시집 《꿈꾸는 섬》 (1982) 수록 ◎시어 풀이 *세한도 : 추사의 그림, ‘세한’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질화로 :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 *따숩다 : ‘따습다’의 전라도 방언. 날씨 또는 마음 등이 따뜻하다. ▲이해와 감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굳은 절개와 의지를 강조한 작품으로 여러 시인에 의해 시로 형상화되었.. 2020. 6. 20.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는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날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문학사상》 (1975) 수록 ◎시어.. 2020. 6. 20.
나팔꽃 / 송수권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鐘)까지 매어 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시집 《꿈꾸는 섬》 (1983) 수록 ◎시어 풀이 *바지랑대 : 빨래줄을 받치는 긴 막대기 ▲.. 2020. 6. 19.
까치밥 / 송수권 까치밥 - 송수권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 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 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 2020. 6. 18.
묵죽(墨竹) / 손택수 묵죽(墨竹) -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친다 아침 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濃淡)*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 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 수록 ◎시어 풀이 *숫눈 : 쌓인 채 그대로 있는 눈. *묵죽(墨竹) : 먹으로 그린 대나무. *질척이는 : 진흙이나 반죽 따위가 물기가 매우 많아 차지고 진 느낌이 드는.. *농담(濃淡.. 2020. 6. 17.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미정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미정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 시집 (2003) 수록 ▲이해와 사랑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음식들의 변화를 통해,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 2020. 6. 16.
신발 / 서정주 신발 - 서정주 나보고 명절날 신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내 신발을 나는 먼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신발은 벌써 변산(邊山)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돌아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그것 대신의 신발을 또 한 켤레 사다가 신겨주시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 그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내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 - 시집《질마재 신화》(1975) 수록 ◎시어 풀이 *개 : 강·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내 : 시내보다 .. 2020. 6. 15.
광화문(光化門) / 서정주 광화문(光化門) -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ㄹ치-ㄹ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 2020. 6. 14.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와도 같은 융륭(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송이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십수만(十數萬)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 2020. 6. 14.
부활(復活) / 서정주 부활(復活) - 서정주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叟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수나, 이게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릿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촛불 밖에 부흥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2020. 6. 14.
수로부인의 얼굴 / 서정주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얼굴 - 서정주 1 암소를 끌고 가던 수염이 흰 할아버지가 그 손의 고삐를 아조 그만 놓아 버리게 할만큼, 소 고삐 놓아두고 높은 낭떠러지를 다람쥐 새끼같이 뽀르르르 기어오르게 할만큼, 기어 올라가서 진달래꽃 꺾어다가 노래 한 수 지어 불러 갖다 바치게 할만큼, 2 정자(亭子)에서 점심(點心) 먹고 있는 것 엿보고 바닷속에서 용왕(龍王)이란 놈이 나와 가로채 업고 천길 물속 깊이 들어가 버리게 할만큼, 3 왼 고을 안 사내가 모두 몽둥이를 휘두르고 나오게 할만큼, 왼 고을 안 사내들의 몽둥이란 몽둥이가 한꺼번에 바닷가 언덕을 아프게 치게 할만큼, 왼 고을 안의 말씀이란 말씀이 모조리 한꺼번에 몰려나오게 할만큼, 「내놓아라 내놓아라 우리 수로(水路) 내놓아라」 여럿의 말씀은 무쇠도 녹.. 2020. 6. 13.
자화상 / 서정주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 2020. 6. 12.
견우의 노래 / 서정주 견우의 노래 -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 시집 《귀촉도》(1948) 수록 ◎시어 풀이 *베틀 : 삼베, 무명, 명주 따위의 피륙을 짜는 틀. *북 : 베틀에서, 날실의 틈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씨실을 푸는 기구. 배 모.. 2020. 6. 11.
춘향의 노래 / 복효근 춘향의 노래 - 복효근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 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년입니다. -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2006) 수록 ▲이해와 감상 우리나라의 고대소설 을 모티브로 한 이시는 춘향을 화자로 설정하여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 2020. 6. 10.
목련후기 / 복효근 목련후기 -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 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시집 《마늘촛불》(200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지는 목련에 빗대어, 후일 열정적인 사랑의.. 2020. 6. 10.
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 / 복효근 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 - 복효근 천변* 잔디밭을 밟고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하자 잔디밭에 외줄기 길이 생겼다 어쩌나 잔디가 밟혀 죽을 텐데 내 걱정 아랑곳없이 가르마 길이 나고 그 자리만 잔디가 모두 죽었다 오늘 새벽에도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데 멀리서도 보였다 죽은 잔디 싹들이 사람의 몸 속에 푸른 길을 내고 살아있는 것이 푸른 잔디의 것이 아니라면 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저렇게 청량하랴* 걷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얘기 소리에서 싱싱한 풀꽃 냄새가 난다 그제서야 나는 잔디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비켜서 있거나 아예 사람 속에서 꽃피고 있음을 안다 그렇듯 언젠가는 사람들도 잔디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도 알겠다 죽음이 푸른 풀잎처럼 반짝이는 순간도 이렇게는 있다 - 《시와 정신》(20.. 2020. 6. 9.
버팀목에 대하여 / 복효근 버팀목에 대하여 -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2000) 수록 ◎시어 풀이 *각목(角木) : 네모지게 깎은 나무. *허위허위 : 1.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 2. 힘에 겨워 .. 2020. 6. 9.
조선의 마음 / 변영로 조선의 마음 - 변영로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굴속을 엿 볼까. 바다 밑을 뒤져 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 볼까. 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볼까. 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볼까.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24년 평문관(平文館)에서 상재된 수주 변영로의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의 표제시로, 나라를 잃은 애처로운 마음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이 시집에는 , , , 등 모두 29편의 시와 부록으로 산문 8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사상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해 압수되고 말았다. 이것 외에도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신·열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작품의 소재나 주제로.. 2020. 6. 8.
봄비 / 변영로 봄비 -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우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신생활》(1922) 수록.. 2020. 6. 8.
통영 – 남행시초 / 백석 통영 – 남행시초 - 백석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황아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客主)* 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 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 2020. 6. 7.
산곡(山谷) -함주시초 5 / 백석 산곡(山谷) -함주시초 5 - 백석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 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짝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나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몇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꾸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2020. 6. 7.
노루 - 함주시초(咸州詩抄) 2 / 백석 노루 - 함주시초(咸州詩抄) 2 -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 감주*에 기장 찰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 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 새끼를 닮었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 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시어 풀이 *넘석하는 : 넘어다 보이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갈 만큼 가까운. *자구나무 : ‘자귀나무’의 찰못. 콩과의 낙엽 활엽 소교목. *기장 감주, 기장 차떡.. 2020. 6. 7.
수라(修羅) / 백석 수라(修羅)*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 2020. 6. 6.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 2020. 6. 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문장》(1938) 수록 ◎시어 풀이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 2020. 6. 5.
국수 / 백석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대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 2020. 6. 4.
고향(故鄕) / 백석 고향(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神仙)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결*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시집 《동방평론》(1932) 수록 ◎시어 풀이 *북관(北關) : ‘함경도’의 .. 2020.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