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by 혜강(惠江)
2020. 6. 5.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문장》(1941) 수록
◎시어 풀이
*바람벽 : 방이나 칸살의 옆을 둘러막은 둘레의 벽. *촉(燭) : 촉광.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
*지치운 : 힘든 일을 하거나 어떤 일에 시달려서 기운이 빠진 *때글은 : 때에 그은. 때가 묻어 검게 된. *앞대 : 남쪽. 여기서는 한반도 남쪽 바다를 의미함. *개포가 : ‘개포’는 ‘개’의 평북 방언.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가장자리 *이즈막하야 : 시간이 이슥하게 지나서.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눈질 : 눈으로 흘끔 보는 것.
*내일 : ‘내다’의 관형어. 창조할.
*프랑시쓰 쨈 : 20세기 초 프랑스의 낭만 시인이며 극작가. 시집으로 《밤의 노래》
*도연명(陶淵明) : 동진 말기부터 남조의 송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 〈귀거래사(歸去來辭)〉·〈도화원기(桃花源記)〉로 유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 :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시인, 20세기 최고의 독일 시인 중 한 사람. 섬세하고 세련된 시어와 감수성으로 언어의 거장으로 불림.. 근대 사회의 모순, 번뇌, 고독, 불안, 죽음, 사랑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토대로 명상적, 신비적 시를 많이 썼다. 장편소설로는 《말테의 수기》가 있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외롭고 쓸쓸한 화자가 흰 바람벽에 투사된 내면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성찰하고 어려운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운명을 극복 의지를 그린 작품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 이 시는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화자의 내면 풍경과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형상화하여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와 극복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해가 저문 시간 객지에 있는 빈방에 앉아 ‘흰 바람벽’을 바라보면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바람벽의 ‘희미한 십오촉 전등’의 불빛과 때가 묻어 검게 된 ‘낡은 무명 샤쯔’는 화자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흰 바람벽’은 화자의 내면을 비추어 주는 도구로서 화자는 ‘바람벽’을 보며 ‘가난한 늙은 어머니’와 ‘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치 스크린에 비치듯 바람벽을 스치며 지나가는 글자를 보며 외로움과 슬픔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체념을 하게 된다. 이처럼 화자가 바라보는 ‘바람벽’은 과거의 추억과 자신의 지난 삶을 비추어 주는 스크린의 역할을 하여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그런데 화자는 24행의 ‘그리고’에 와서 이러한 체념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위로와 위안,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는 의기소침한 화자의 ‘의식이 변화’를 일깨우는 것으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즉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화자의 이러한 의식은 운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가난하지만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외롭고 쓸쓸한 자기 삶에 대한 위로이며 위안인 동시에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여기서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당나귀, 프랑시쓰 쨈, 도연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 등은 모두 외롭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이자 자신과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는 대상들로서 고단한 삶 속에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와 통한다.
특히, 아 시에서 주목할 것은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별 헤는 밤>의 5연에서 보이는 자연물과 인물을 호명하는 진술 방법이 흡사하고 호명하는 대상 중 ‘프랑시쓰 쨈’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겹친다. 이 두 인물은 유독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인물들이다. 특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적 태도, 순수하고 투명한 언어의 사용, 진실한 고백 등의 시적 표현 방법 역시 그렇다. 이로 볼 때 백석의 시가 윤동주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작자 백석(白石, 1912~1995)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30년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단에 들어섰다. 곧 시 쓰기로 방향을 바뀌서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후반에는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담은 기행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즐겨 썼다. 대표작으로는 <여승>, <여우난곬족>, <남신의주 박시봉 방>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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