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수라(修羅) / 백석
by 혜강(惠江)
2020. 6. 6.
수라(修羅)*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 시집 《사슴》(1936) 수록
◎시어 풀이
*수라(修羅) : 불교에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신(神), 아수라(阿修羅). 여기서는 가족 공동체를 방해하는 현실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함
*어니젠가 : ‘언젠가’의 평안도 방언. 여기서는 ‘어느 사이엔가’라는 뜻.
*아린 :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운.
*싹기도 : 삭기도,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기도.
*가제 : ‘갓’, ‘방금’의 평안도 방언.
*아물거린다 : 작거나 희미한 것이 보일 듯 말 듯하게 조금씩 자꾸 움직인다.
*무서우이 : 무섭게 여기며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거미 가족의 모습을 통해 붕괴된 가족 공동체의 아픔과 회복에 대한 소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수라(修羅)’는 ‘아수라’의 줄임말로 불교에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신을 의미하며, 이 시에서는 거미 가족이 함께 지내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화자는 가족과 흩어진 거미를 보며 여닌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거미 가족이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시는 시적 대상을 의인화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으며, 거미를 ‘문밖으로 버’리는 화자의 반복된 행동을 통해 시상이 전개되며, 화자의 감정이 고조됨을 표현하기 위해 매 연마다 특정 행동을 점층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모두 3연으로 된 이 시는 1연에서 거미 새끼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리고, 2연에서는 이어 나타난 어미 거미를 새끼가 있는 문밖으로 쓸어버리며 서러워하고, 3연에서는 아주 작은 새끼 거미를 제 가족을 만나라고 종이에 받아 가족들이 있는 문밖으로 버리며 슬퍼한다. 이러한 행위에는 가족 공동체의 회복을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거미 새끼 한 마리가 방바닥으로 내려오자 무심히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문밖으로 쓸어버린다’는 행위는 가족 해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아어 오는 ‘차가운 밤’과 연결되어 거미 가족이 처한 비극이 강조된다. 이어 2연에서는 새끼 거미를 찾아온 큰 거미(어미 거미)를 발견한 화자는 ‘가슴이 짜릿’해지고, 큰 거미(어미 거미)를 새끼 거미가 있는 문밖으로 쓸어 버리며 서러움을 느낀다.
그 다음 3연에 와서 화자는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큰 거미(어미 거미)가 없어진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메이는 듯’하여, 거미 가족이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거미를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싸서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이처럼 화자는 거미를 문밖으로 쓸어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했던 정서가 ‘가슴이 짜릿하다’, ‘서러워한다’로바뀌면서 공감과 연민을 드러내고,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서럽게 한다’, ‘슬퍼한다’로 점층적으로 심화하여 슬픔이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으로 이어지면서 재회의 소망으로까지 연결된다.
이 시는 거미 가족을 문밖으로 쓸어 버린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아픔과 회복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것이지만, 이 시가 창작된 시기를 고려하면, 거미 가족은 일제 강점으로 해체된 우리 민족의 가족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이 시는 거미 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 공동체마저 파괴되어 ‘아수라’와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공동체적인 삶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작자 백석(白石, 1912~1995)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30년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단에 들어섰다. 곧 시 쓰기로 방향을 바뀌서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고 후반에는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담은 기행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즐겨 썼다. 대표작으로는 <여승>, <여우난곬족>, <남신의주 박시봉 방>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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