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山谷) -함주시초 5
- 백석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 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짝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나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몇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꾸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시어 풀이
*산곡(山谷) : 산골짜기.
*돌각담 :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담
*아주까리 : 피마자. 버들옷과에 딸린 일년생 풀
*잠풍하니 : 잔잔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터앝 : 텃밭. 집의 울안에 있는 밭.
*낟가리 : *낟알이 붙은 곡식의 단을 쌓은 더미.
*산대 : 산꼭대기
*돌능와집 : 너와 집. 납작납작한 돌을 지붕에 기와 대신 올린 집.
*남길동 : 저고리 소매의 부리에 이어서 대는 남색의 천.
*낮 기울은 : 해가 저물어가는
*도락구 : ‘트럭’의 일본식 발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산곡’에서 한겨울을 나려는 화자가 비는 집을 구하면서 이 땅의 백성들이 모두 제집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벌들을 부지런한 백성들이라고 비유하여서 단순한 골 안의 모습을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 의미를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시의 화자인 ‘나’는 어서 추워져서 산골짜기에 있는 자그마한 ‘돌능와집’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한다. 그 집 마당에 있는 꿀벌통을 보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이 시는 상징적인 공간을 활용한 서사적인 묘사를 통하여 인물의 내면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토속적인 시어와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여 전형적인 산골의 정경과 산골 생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내용의 줄거리는 대개 이렇다. 화자는 돌각담에 머루 송이가 까맣게 익고, 자갈밭으로 아주까리(피마자) 열매가 쏟아지는 가을에 바람이 잔잔하여 포근하고 양지바른 골짜기에서 한겨울을 보낼 ‘집 한 채’를 구하였다. (1연) 집이 몇 채 안 되는 골짜기 안에는 이미 텃밭에 감장 감이 자라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 있어서 겨울을 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쉽사리 빌 듯한 집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빈집을 찾아 골짜기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2연) 그런데 골이 끝나는 산꼭대기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너와집)이 한 채가 있었다. 이 집에는 소매에 남길동을 단 안주인이 있었는데, 그는 겨울이면 집을 비워두고 산 아랫마을로 내려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양지바른 마당에 20여 개의 벌통이 있었다. (3연) 어느덧 해는 기울었지만, 해가 따갑게 내리쬐는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지난여름 트럭을 타고 장진(長津)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벌들을 바라보며, 화자인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은 초겨울이 되어 부지런한 벌들이 모두 제집으로 들어간 뒤 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와 편안히 쉴 것을 생각한다.
이 시에서 ‘바즈런한 백성’의 원관념은 산대 밑에 있는 ‘스무나문 통’에 사는 꿀벌이지만, 이 시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쓰인 것을 고려하면, 집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이 하루속히 ‘제집’으로 돌아가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자 백석(白石, 1912~1995)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30년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단에 들어섰다. 곧 시 쓰기로 방향을 바뀌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후반에는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담은 기행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즐겨 썼다. 대표작으로는 <여승>, <여우난곬족>, <남신의주 박시봉 방>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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