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우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신생활》(1922) 수록
▲이해와 감상
변영로 시인이 1922년 3월 《신생활》지에 발표한 이 시는 20년대 전반기 한국 서정시의 정상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그의 섬세한 정서와 세련되고 섬세한 시어와 깔끔한 기교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은실같이 내리는 봄비를 보면서 오지 않을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서정시이다. 시인은 봄비가 내리는 소리를 임이 부르는 소리로 착각하고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임의 부재(不在)를 확인하고는 아쉬워하며, 돌아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 시는 각연의 1,2행에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와 ‘나아가 보니’라는 시행의 반복하여 봄비의 부름과 그에 대한 시인의 정감을 한 문맥에 접목시키고 있으며, '노라!'ㆍ'누나!' 등의 영탄조의 어미 사용은 이 작품을 보다 더 낭만적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와 같은 반복구는 시의 리듬을 교묘하게 살리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1연의 3행과 5행 사이에서 직유와 복합되어 나타나는 활유, 2연의 3행 이하에서 보이는 직유와 복합된 은유, 그리고 마지막 연 중 가늘게 내리는 봄비의 정경 묘사에서 보이는 참신한 비유와 언어의 절제미는 가히 일품이 아닐 수 없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낭만적 분위기 속의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는 비가 내리는 소리이지만, 화자에게는 임이 부르는 것 같은 소리로 착각한다. 화자는 이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가 보지만, ‘젖빛 구름’만 하늘 위를 거닐 뿐이다. ‘무척이나 바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는 간절한 화자의 처지와 대조적인 풍경으로 화자의 실망감을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이며,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은 역설법과 영탄법으로 화자의 야속하고 서운한 심정을 구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푸른 하늘의 구름에 견주어 자신의 서운함을 묘사한 화자는 2연에 와서는 추억을 회싱하며 연약한 숨결을 느끼게 하는 꽃을 묘사함으로써 아픈 심정을 드러낸다. ‘아렴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니, 꽃(임)은 보이지 않고 꽃향기들만 그윽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본 화자는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이라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상은 찔리지도 않았는데 찔린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또 3연은 주제연으로 구름도 사라지고 꽃향기도 사라진 상태에서,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라고 노래한다. 일반적으로 봄비는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하지만, 이 시에서는 일반적인 봄비의 의미와 대조적으로 ‘근심같이’ 내린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암담하고 애타는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안 올 사람 기두리는 나의 마음!’에서 보듯, 어쩌면 화자는 아예 '안 올 사람'을 기다리며 아파하는 것이다. 여기서, ‘안 올 사람’은 물론 ‘떠나간 임’이지만, 그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하면 우리 민족이 학수고대하는 ‘조국의 광복’일 수도 있다. 따라서 ‘기두리는 나의 마음’은 마치 한용운의 ‘님’을 상기시킨다. 한용운의 ‘님’이 조국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의 ‘부르는 소리’도 조국이 부르는 소리이며, ‘안 올 사람을 기두리는 마음’은 조국의 광명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변영로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시인의 감각적인 통찰로 빚어진 아름다운 정감과 그윽하고 부드러운 선율이라는 그릇에 담아 여성 편향적 어조로 전할 줄 알았던 기량 있는 시인이었다.
▲작자 변영로(卞榮魯, 1897~1961)
호는 수주(樹州). 서울 출생.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1920년대의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초기시에 나타나는 연이나 행의 반복에 따른 표현의 기교와 음수율로 인한 음악적 요소는 서정시의 극치를 보여준다.
《페허》의 동인이면서도 《백조》류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건강한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냈다. 서정적 가락과 민족애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작품으로 <논개>가 있다. 시집 《조선의 마음》(1924)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 외에도 시집으로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1959),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1983)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수주수상록》,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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