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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국수 / 백석

by 혜강(惠江) 2020. 6. 4.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대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 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素朴(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문장》(1941) 수록

 

 

시어 풀이

 

*멕이고 : 울음소리를 내고

*애동 : 어린아이.
*김치가재미 : 김치를 얼지 않게 지푸라기로 지어놓은 움막. 창고.
*양지귀 : 양지바른 곳의 모퉁이.
*능달 : 응달.
*은댕이 : 언저리. 가장자리. 산비탈에 턱이 져 평평한 곳.
*예데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하로밤 : 하룻밤

*접시귀 : 접시의 한쪽에 바깥쪽으로 내밀어 만든 구멍.

*산멍에 :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의 평안도 방언.
*분틀 : 국수를 뽑아내는 틀.

*들쿠레한 : 달고 시원한

*텁텁한 : 흐릿하고 깨끗하지 못한

*둔덩 : 둔덕

*사리워 : 담기어

*길여 났다는 : 길러졌다는

*큰마니 : 할머니

*짚등색이 : 짚이나 칡덩굴로 만든 자리

*자채기 : 재채기

*큰아바지 : 할아버지
*슴슴한 : 자극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싱거운.
*댕추가루 : 고춧가루

*탄수 : 식초

*더북한 :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거칠어 수북한.

*삿방 :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이르궅 : ‘아랫목’의 방언

*살틀하니 : 살뜰하니.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자상하고 지극하니.

*고담(枯淡) : 꾸밈이 없고 담담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일제 치하 민족의 주체성이 해체되는 위기 상황에서 《문장》 폐간호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는 시인이 어린 시절에 먹던 ‘국수’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국수’에 담긴 우리의 민속성과 넉넉지 않아도 평화롭고 푸근했던 공동체적인 삶에 대하여 애정과 그리움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에서 ‘국수’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다. 민족과 민족성 자체를 환기하는 그 무엇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던 우리 민족의 푸근한 심성을 의미한다.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이어 등장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평화롭고 화목한 고향 마을의 정경을 재구성하고, 특히 식생활과 관련된 삶의 모습을 마치 직접 눈앞에서 보듯이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민족 구성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 평안도 방언을 구사하여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정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무엇인가?’의 반복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며, 우리 전통문화의 정취를 일깨우고, ‘이것은 ~ 오는 것이다’라는 어구를 반복하여 리듬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국수’에 대한 친밀감과 반가움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연에서는 국수를 통해 본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2연에서는 국수에 대한 묘사와 국수에 곁들여 먹는 음식의 맛을, 3연에서는 꾸밈 없는 국수에 담긴 소박한 민속성과 우리 민족의 정신적 가치를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제목에서 ‘국수’라는 말을 언급할 뿐, 시에서 직접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국수를 신성한 그 어떤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수는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시절부터 내려온 것이며, 국수를 먹는 날은 온 마을이 ‘구수한 즐거움’에 싸여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이치다. 만일 이 시에서 ‘이것’ 대신에 ‘국수’라는 말을 박복적으로 사용했다면, 국수의 신성성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시가 밋밋하고 긴장감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시인은 이어서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며,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며,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상 1연)이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2연에 와서 시인은 ‘반가운 것’의 정체를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국수와 함께 먹는 동치미국과 양념으로 넣는 ‘얼얼한 댕추가루’, 고명으로 얹는 ‘산꿩의 고기’, 그리고 ‘식초’ 등 감각적인 이미지의 시어와 국수를 먹는 방의 모습까지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 내고 있다.

 

  마지막 3연에서는 ‘국수’의 이미지를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으로, 그리고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으로 진술한다. 이것은 꾸밈없고 담담한 국수의 이미지를 통해 농촌 공동체 속에서 정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결국, ‘국수’의 속성은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속성과도 부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시인은 가난하지만, 정겹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우리 민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 시가 발표된 1941년은 일제에 의해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창씨개명이 강요되었음을 고려할 때, 이 시는 현재 흩어져 버린 민족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과 민족적 유대감 회복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작자 백석(白石, 1912~1995)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30년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단에 들어 섰다. 시로 방향을 바뀌,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후반에는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담은 기행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즐겨 썼다. 대표작으로는 <여승>, <여우난곬족>, <남신의주 박시봉 방>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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