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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우포늪 왁새 / 배한봉

by 혜강(惠江) 2020. 6. 2.

 

 

 

 

 

 

우포늪 왁새*

 

 

-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서리꾼*이었다. 신명난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의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매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 시집 《우포늪 왁새》(2002) 수록

 

 

◎시어 풀이

 

 

*우포늪 : 경상남도 창녕에 있는 늪으로, 342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생태계. 1997년 생태계 특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에 등록하고, 보존 습지로 지정되었다.

*왁새 : ‘왜가리’의 북한어.

*득음 : 노래나 연주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경지에 이름.

*서리꾼 : 서리를 하는 장난꾼.

*절창 : 뛰어나게 잘 부름. 또는 그런 노래.
*둔치 : ① 물가의 언덕. ② 장마가 져서 물이 불을 때에만 잠기는 강가의 땅. 고수부지.

*자운영(紫雲英) : 콩과의 두해살이풀. 중국 원산. 줄기는 땅 위에 가로 뻗고 잎은 깃꼴 겹잎. 봄에 자줏빛 꽃이 피고 열매가 익음.

*혈혈단신(孑孑單身) :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홀몸.

*텁텁한 : 무던하고 소탈한
*고수 : 북이나 장구 따위를 치는 사람.

*동편제(東便制) : 판소리에서, 조선 영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법제에 따라 부르는 창법의 유파. 웅건하고 청담(淸淡)함.
*완창 : 판소리 한마당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일.

 

 

 

▲이해와 감상

 

 

  우포늪은 경남 창녕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늪지이다. ‘우포늪 지킴이’, ‘우포늪 왁새’로 불리는 시인이 우포늪에서 살아가는 왁새의 울음소리를 어느 소리꾼의 소리에 빗대어 우포늪이 가진 생명적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생명 공동체의 현장인 우포늪의 소중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는 우포늪에 사는 왁새 울음소리를 소리꾼의 목소리에 빗대어 표현하고,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상을 감각적으로 전개하여 우포늪의 생명적 가치를 소리꾼의 진정한 소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우포늪에 가면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왁새(왜가리)를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은 ‘왁새 울음’ 소리를 들으며 전생에 득음을 못 한 채로 생을 마감한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인 한 소리꾼을 떠올린다. 물론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화자의 상상에서 나온 인물이다. 그는 시골장에서 ‘막걸리 한 사발’이면 만족하는 소탈한 소리꾼이지만, 평생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것 같은 진정한 소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우포늪에 와서 왁새의 울음이 되어 우포늪의 솔밭과 자운영에 퍼지는 것이다. ‘오늘은 왁새 울음이 되어’라는 표현은 소리꾼과 왁새를 동일시하는 것이며, 왁새 울음이 ‘우왕산 솔밭을 다 적시고’는 왁새 울음이 우포늪 둔치에 ‘꽃불을 질러 놓’은 듯 생명력을 북돋워 주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그 소리꾼은 평생 혈혈단신으로 슬픔을 안고 살면서 가끔 늙은 고수를 만났을 때 소리 한번 해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평생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소리꾼이 헤매며 찾던 소리가 왁새 울음 소리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왁새가 된 소리꾼은 우포늪에서 근원적인 생명의 힘을 얻음으로써 ‘영혼의 심연’에서 나오는 진정한 소리를 만나 평생을 꿈꾸어 오던 완창을 하게 되었다. 원시 생명력을 가진 우포늪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소리꾼의 완창 소리는 우포늪을 비롯한 생명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게 된다.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는 것은 생명력을 북돋워 주는 왁새 울음이 상생을 통해 공존하는 생명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주제 의식을 환기시킨다.

 

  결국, 이 시는 한 소리꾼이 진정한 소리를 찾아 완창하는 과정을 통해 우포늪이 갖고 있는 원시 생명력의 힘을 강조하는 동시에, 우포늪이 가진 원시의 생명력을 통해 생명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생태시이다.

 

 

 

▲작자 배한봉(裵漢奉,1962~ )

 

 

  시인.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의 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서정시의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를 쓴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우포늪시생명제’를 주재하여 생태문학 발전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시집으로 《흑조》(1998), 《우포늪 왁새》(2002), 《악기점》(2004),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2006), 《주남지의 새들》(2017) 등이 있다. 산문집에 《우포늪, 생명과 희망과 미래》(2009), 《당신과 나의 숨결》(2013)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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