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불법체류자들 / 박후기
by 혜강(惠江)
2020. 5. 31.
불법체류자들
- 박후기
소읍* 변두리 처가(妻家) 술 떨어진 밤 술 사러 간다 날벌레들 싸락눈처럼 몰려드는 가로등 밑 공중전화 똑, 똑 전화카드 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똑, 똑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고향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소를 닮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축축한 달빛이 일렁인다 * 플라타너스 오그라든 나뭇잎 몰래 귀 기울이다 철커덕 수화기 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켜*를 놓친 순간 나뭇잎도 지상(地上)의 불법체류자가 되나니, 불법체류자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밤늦도록 사각거린다*
-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2009) 수록
◎시어 풀이
*소읍 : 주민과 산물이 적고 땅이 작은 고을
*그렁그렁한 : 눈에 눈물이 넘칠 듯이 그득 괴어 있는.
*일렁이다 : 1. 크고 긴 물건 따위가 이리저리 크게 흔들리다. 2. 촛불 따위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떨켜 : 낙엽이 질 무렵 잎자루와 가지가 붙은 곳에 생기는 특수한 세포층. 굳어져서 수분(水分)을 통하지 못하게 하고 이 부분에서 잎이 떨어지며 그 떨어진 자리를 보호함. 이층(離層). 분리층.
*사각거리다 : 1. 벼, 보리, 밀 따위를 베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2. 눈이 내리거나 눈 따위를 밟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3.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이해와 감상
불법체류자들의 삶은 언제나 풍전등화와 같이 하루하루의 삶이 외롭고 고달픈 삶일 것이다. 이 시는 서울 근교의 외딴곳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애 어린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특별히 ‘사각거린다’는 의성어를 통해 통화중인 상황을 나뭇잎과 병치(倂置)하여 표현 효과를 높이고 있다.
처가에 들렀던 화자는 술을 사기 위해 나선 밤에 누군가가 ‘가로등 밑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똑, 똑/ 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똑, 똑/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고향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여기서 ‘똑, 똑’ 소리는 전화카드 돈 떨어지는 소리는 흡사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있는 네팔이거나 파키스탄에 있는 고향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자세히 보니, 전화 거는 사람은 전화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소를 닮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축축한 달빛이 일렁인다’는 표현은 순순한 눈망울로 고향을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화자의 눈에는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그의 사연에 귀를 기울리다가 ‘수화기 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자 화자는 떨어지는 그 플라타너스 나뭇잎도 불법체류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제자리에서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불법체류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불법체류자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밤늦도록 사각거린다’라는 표현은 나뭇잎의 사각거림과 통화 중의 사각거림을 병치시켜 표현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전화하는 이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는 화자이다. 따라서 수화기 소리에 놀란 이도 화자일 텐데, 이를 나뭇잎의 놀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전화하던 이와 나뭇잎은 전화 부스에서 밤늦도록 사각거리는 ‘불법체류자들’로 결합하고 있다.
이 시는 소리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전화로 매개된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고, ‘분리’라는 속성을 통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유하여, 우리 땅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의 비애를 시각적 ·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작자 박후기(1968 ~ )
시인. 경기도 평택 출생. 본명 박홍희.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내 가슴의 무늬> 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삶 속에서 확인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삶의 비애와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2006),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2009), 《격렬비열도》(2015), 《엄마라는 공장 여자라는 감옥》 《사랑의 발견》 등이 있고, 산문사진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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