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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

by 혜강(惠江) 2020. 6. 14.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와도 같은 융륭(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송이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십수만(十數萬)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어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 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黃昏)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찾아들어 돌아오는 -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 하는 미물(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서 설음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송아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 귀소(歸巢)*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山)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랜 종(鐘)소리를 들릴 일이다.

 

   - 《현대공론》(1954.11) 수록

 

 

◎시어 풀이

 

*융륭(隆隆) : 물의 양이 많고 높게 가득히 흐르는 모양

*마짓굿 :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여 달라고 비는 의식

*못물 : 논에 모를 내는 데 필요한 물.

*유두 분면(油頭粉面) : 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이라는 뜻으로, 여자의 화장한 모습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유

*아스라한 : 1. 보기에 아슬아슬할 만큼 높거나 까마득하게 먼. 2.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고 희미한.

*침잠(沈潛) : ① 물속에 가라앉거나 숨음. ② 마음을 가라앉혀서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함. ③ 성정(性情)이 깊고 차분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함.

*미물(微物) : ① 작고 변변치 않은 물건. ② 인간에 비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동물을 이르는 말.

*비비새 : 뱁새(호남의 방언)

*송어리 : 꽃,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

*귀소(歸巢) : 동물이 집이나 둥지로 돌아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슬픔을 넘어선 삶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으로, 제목인 ‘상리과원’은 ‘상리’라는 마을의 어느 과수원이란 뜻이다. 과수원의 만개한 꽃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이 힘겨움 속에서도 즐거울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25 때 소위 자살 미수를 겪은 후 깨달은 바 있는 범신론적(汎神論的) 낙천주의와 만개한 과목(果木)에서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합됨으로써 화창한 봄과 같은 삶의 찬란한 희열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산문적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호남지방의 방언과 풍부한 시어, 비유적 표현으로 빛과 향기로 충만한 찬란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이지만, 5개의 형식 단락으로 나누어 시상의 흐름을 보면, 첫 단락에서는 과수원의 만발한 꽃의 모습을 ‘조카딸년과 그 친구들의 웃음판’으로 비유하여 순진무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둘째 단락에서는 만발한 꽃을 찾아드는 온갖 새들과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계절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과수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단락에서는 앞의 두 단락에서 분출되던 격정적인 호흡을 멈추고, 서경적 표현을 서정적으로 전환시켜 아름다운 자연과 합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유두분면’이란 기름 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로 흔히 부녀자의 화장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넷째 단락에서는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 자연 속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화자가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세상을 소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다섯째 단락은 주제 단락으로, 깊은 밤이 오게 되면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보여 주고, ‘제일 오랜 종소리’를 들려 주어야 한다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의 꿈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은 꿈과 이상의 대상이며, ‘제일 오래인 종(鐘)소리’는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실을 극복하고 인간 구원을 염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화자는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상징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를 불식시키고 더 나아가 ‘상리과원’ 같은 기쁨이 충만한 미래 지향적인 삶을 고취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當).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으로 인간의 원죄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으나, 후에 불교 사상과 샤머니즘 등 동양적인 사상을 노래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화사집》(1941), 《귀촉도》(1948),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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