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
- 서정주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叟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수나, 이게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릿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촛불 밖에 부흥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 《조선일보》 (1939.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서정주 시인이 죽은 ‘수나’에 대한 그리움과 부활의 소망을 담은 작품이다. 이 시는 행과 연 갈음을 자제하여 유장한 분위기의 단절을 차단하고 마무리 단계에서 감정의 토로를 통하여 애절한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말 줄임표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억제하기 어려운 감정을 조절하고,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보다는 장면과 이미지 중심으로 형상화하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은 수나를 ‘새벽 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고 한다. ‘새벽 닭’의 울음은 시인에게는 수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는 소재로서, 시인은 매일 새벽마다 그리움으로 수나를 불러 본다. ‘꽃상여가 산 넘어서 간 다음’에는 ‘빈 하늘’ 같은 절망감으로 지내던 시인에게 죽은 연인인 ‘수나’가 이 시의 제목처럼, 종로에서 그 거리에 걸린 무지개 위에서 아름답게 부활한 것이다. 그리운 연인은 ‘종로 네 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서 열아홉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 그들의 눈망울 속에 들어 앉아’ 있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눈망울’은 종로거리의 처녀들과 화자 사이의 교류의 통로이자 유명을 달리한 ‘수나’를 만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시인은 죽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비 갠 거리를 걷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젊은 처녀들의 자태에서 ‘수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라고 애절해 한다. 마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이 시에서 시인은 남몰래 오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일상을 살다가 불현듯 그 사람과 마주칠 때가 있다. 아니, 마주친 듯 그 얼굴 그 이름이, 마치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부활한 그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특히, 그와 함께 거닐었던 거리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그를 닮은 것처럼 착시현상(錯視現象)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름답다 못해 애틋한 부활의 꿈, 우리는 모두 이 같은 꿈을 안고 살아간다.
이 시의 ‘수나’는 어느 곳에서는 ‘유나’ 혹은 ‘순(順)아’로 표기하고 있다. 미당의 삶과 함께 대표 시에 얽힌 일화를 밝힌 저서 《미당 서정주 평전》(2015, 이경철)에는 미당이 젊은 날에 짝사랑했던 여성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미당은 그 사랑의 추억을 ‘내 너를 찾아왔다 유나(臾娜)’라며 적고 있다. 미당은 생전에 “원래 이름이 ‘유라’였는데 ‘유나’라고 쓴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임유라’는 본명이 아니었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유라’가 아니라 시인이 ‘수나(叟娜)라고 쓴 것의 오식(誤植)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미당도 “수나라고 읽어야지, (실제 인물이 아니라) 그냥 상징인 거지”라고 말한 적도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나’와 ‘수나’ 논쟁도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시인은 아예 작품 중의 이름을 우리 정서에 맞는 ‘순(順)아’로 바꾸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뒤의 몇몇 연구자는 ‘임유라’의 본명이 ‘임순득(任淳得)’이라고 주장했다. 《미당 서정주 평전》의 저자는 미당의 동생 서정태 시인을 취재하고 ‘임유라의 실제 이름은 임순득’이라는 답을 받아 내기도 했다. 이런 혼선을 거듭하면서 <부활>의 ‘수나’는 ‘유나’ 혹은 ‘순아’로 표기되었다.
▲작자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當).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으로 인간의 원죄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으나, 후에 불교 사상과 샤머니즘 등 동양적인 사상을 노래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화사집》(1941), 《귀촉도》(1948),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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