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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자화상 / 서정주

by 혜강(惠江) 2020. 6. 12.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시건설》(1939) 수록

 

◎시어 풀이

*바람벽 : 방을 둘러막은 둘레의 벽.

*천치(天癡·天痴) : 백치(白癡). 뇌의 장애·질병 등으로 정신 작용의 발달이 저지되어, 나이에 비해 지능이 낮은 사람. 또는 그런 병.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서정주 시인의 초기 시 세계에 속하는 시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노래하며 자의식과 관능적 욕구에 몸부림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작품군(作品群)에 속한다.

 이 작품은 화자가 시련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지나온 고통스러운 삶에 굴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지독하게 가난한 삶, 반란군의 후손으로 낙인찍힌 자신의 가족사를 ‘팔할(八割)의 바람’이라고 압축적으로 드러내면서,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의지적으로 살아가겠다는 태도를 상징과 비유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고백적 어조와 직접인 화법을 사용하여 주제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제목 ‘자화상’이 보여 주듯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은 ‘나’의 미천하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종의 아들’이었으며, 어매는 가난해서 임신 중에 ‘풋살구’ 같은 신 과일 하나 먹을 수 없었으며, 외할아버지는 갑오년(甲午年, 1894년)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로 동학군에 가담한 것을 숨기고 있는, 미천하고 가난했던 삶을 살아왔음을 토로한다.

 이런 삶을 살며 스물세 살이 된 화자는 지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람’은 시련과 고통, 방황의 삶을 암시한 것이다. 보잘것없는 집안 내력, 가진 것 없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화자는 바람처럼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고통 가득한 방황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웠고, 다른 이들로부터 동학군에 가담했던 외할아버지의 손자라는 점 때문에 ‘죄인’처럼, 종의 아들로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는 점 때문에 ‘천치’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아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질 않을 란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이겨내고자 하고 있다. 오히려 시련과 고통의 삶이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그래서 3연에 와서 화자는 ‘병든 수캐’와 같이 헐떡거리며 살아왔지만,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 그의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이라는 노력의 결정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은 삶의 고통을 이겨낸 정신적·예술적 결정체로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화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시를 써온, 치열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왔음을 성찰하고 있다.

 

▲작자 서정주(徐廷柱, 1915 ~ 2000)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當).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으로 인간의 원죄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으나, 후에 불교 사상과 샤머니즘 등 동양적인 사상을 노래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화사집》(1941), 《귀촉도》(1948),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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