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죽(墨竹)
-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친다
아침 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濃淡)*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 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 수록
◎시어 풀이
*숫눈 : 쌓인 채 그대로 있는 눈.
*묵죽(墨竹) : 먹으로 그린 대나무.
*질척이는 : 진흙이나 반죽 따위가 물기가 매우 많아 차지고 진 느낌이 드는..
*농담(濃淡) : 짙음과 옅음. 또는 진함과 묽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장에 가시는 할머니의 발자국을 ‘묵죽(墨竹)’에 빗대어 어린 시절의 겨울 풍경을 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 <묵죽(墨竹>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1, 2연에서 시인은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할머니가 얇게 깔린 그대로의 깨끗한 눈을 밟고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친다’라고 묘사한다. 여기서 ‘치다’라는 말은 ‘붓이나 연필 따위로 점을 찍거나 선이나 그림을 그리다’의 뜻이다. 이 작품에서는 눈에 점점이 찍힌 할머니의 발자국을 ‘묵죽’(먹으로 그린 대나무)을 그리는 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참신한 묘사인가? 시인은 눈에 위에 찍힌 할머니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마음속의 풍경을 언어로 그려낸다.
이어 시인은 3, 4연에서 ‘묵죽’으로 표현된 풍경을 묘사한다. ‘아침 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며 짙은 농담(濃淡)을 이룬다’. 그림은 눈이 녹으면서 ‘묵죽’에서 진하고 묽은 색이 어우러진 한 폭의 수묵화로 풍경을 바꾸는 것이다. 나아가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 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있다며, 한 폭의 수묵화로 완성되는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추억 속의 화자인 ‘어린 나’는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거나,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꼭 그 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겨울 풍경인 ‘묵죽’을 창틀에 끼워놓고 눈 녹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많지도 적지도 않게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이다. ‘싸륵싸륵’이나 ‘우지끈’ 등의 감각적 시어들은 ‘눈 녹는 소리’와 ‘눈이 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섬세한 감수성과 더불어 이 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특히 ‘눈 녹는 소리’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눈이 오는 소리’라는 생성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베껴 그린 그림 한 장’인 ‘묵죽’의 멋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 시는 서정적 자아의 위치와 그가 바라본 풍경 사이의 행복한 화합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섬세한 유년의 감수성으로부터 힘들게 끌어 올려진 작품이다.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눈이 녹아서 질척이는 길은 ‘먹물’이 되고, 할머니의 발자국이 녹아 ‘댓이파리’가 되어 비로소 한 폭의 ‘묵죽’이라는 수묵화가 될 때까지 ‘어린 나’는 얼마나 오래 바라보고 있었을까.
▲작자 손택수(1970 ~ )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호랑이 발자국》(2003),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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