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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나팔꽃 / 송수권

by 혜강(惠江) 2020. 6. 19.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鐘)까지 매어 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시집 《꿈꾸는 섬》 (1983) 수록

 

◎시어 풀이

 

*바지랑대 : 빨래줄을 받치는 긴 막대기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나팔꽃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성찰한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바지랑대 끝까지 줄기가 뻗은 나팔꽃이 화자의 예상과 달리 바지랑대 끝을 넘어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며,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자연물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주제 의식을 도출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층의 방식을 활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외부의 대상인 ‘나팔꽃’을 향하던 화자의 시선이 마지막 부분에 와서 화자 자신의 내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시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1~6행까지는 나팔꽃이 화자가 예상과 다르게 자라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바지랑대의 끝’까지 뻗어 있는 나팔꽃을 보며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화자의 예상과 달리 다음 날 아침 바지랑대를 넘어 허공으로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나팔꽃을 보며 놀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다시 한번 경탄한다.

 

  이제는 더는 갈 곳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을 생각하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나팔꽃은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을 달고 아침 하늘에 은은한 종소리를 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자는 나팔꽃이 한계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이를 이겨 내고 있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기서 ’두세 개의 종‘은 나팔꽃의 꽃봉오리를 의미하는 은유이며, ’은은한 종소리‘는 은은한 모양의 꽃을 피웠음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모습의 나팔꽃을 보면서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즉, 인간도 나팔꽃 줄기처럼 시련을 딛고 일어설 때 더욱 성장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여기서 ’푸른 종소리‘는 아픔을 이겨 낸 상태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나팔꽃이 만들어 낸 ’은은한 종소리‘와 대응하는 시구인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나팔꽃을 통해 아픔이 삶을 성숙하게 한다는 인생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차분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송수권(宋秀權, 1940 ~ )

 

 

   시인,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남도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한민족의 한과 부정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3), 《아도(啞陶)》(1985),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 《벌거숭이》(1987),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등이 있으며, 장편서사시 <동학란>(1975)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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