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하류(下流) / 이건청 하류(下流) - 이건청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 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 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 2020. 7. 31. 석류(石榴) / 이가림 석류(石榴)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 시집 《순간의 거울》(1995) 수록 ◎시어 풀이 *잉걸불 : 이글이글 핀 숯불. 불잉걸. 혹은 다 타지 않은 장작불. *심연(深淵) : ① 깊은 .. 2020. 7. 31. 흥보가(興甫歌) / 윤제림 흥보가(興甫歌) - 윤제림 먼 나라 새들이 우리나라 하늘 밖으로 날아갑니다 때가 되어서 가는지 살 수 없어 가는지 알 순 없지만 이 나라 찾아들던 길을 되짚어 다른 하늘로 날아갑니다 다치고 병든 새들만 남아서 아직 뜰 수 없는 새들만 남아서 산 깊이 물 깊이 숨어서 날아가는 새들 하늘 끝까지 눈으로 좇아갑니다 빛이여, 형제여 고향 집에 소식이나 전해 달라고 기운 없는 날개를 퍼덕입니다 흥보*를 만나 용케 귀국 길에 오른 베트남 새 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갑니다. - 《그는 걸어서 온다》(2008) 수록 ▶시어 풀이 *흥보 : 판소리 에 나오는 마음씨 착하고 우애 있는 아우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우리 나라의 고전인 '흥부가'의 내용을 인용, 외국인 노동자들을 '새'로 비유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연.. 2020. 7. 30. 산동네의 밤 / 윤성택 산동네의 밤 - 윤성택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 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 2020. 7. 30. 태초(太初)의 아침 / 윤동주 태초(太初)의 아침 - 윤동주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인이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1941. 5. 31)에 쓴 적품으로 알려져 있다. 《성서》의 창세기(創世記)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여 태초부터 선과 악이 공존하였다는 깨달음을 통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 작품이다. 제목인 ‘태초의 아침’은 ‘밝음’의 이미지이며, ‘그 전날 밤’은 ‘어둠’의 이미지로 서로 대조를 이룬다. 한편 ‘빠알간 꽃’, ‘어린 꽃’, ‘사랑’은 선(善)의.. 2020. 7. 29.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출전 《조선일보》(1939) ◎시어 풀이 *앳된 : 애티가 있어 어려 보이는. *늬 : ‘너’의 방언. *설은 : 빈틈이 있고 서투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화자가 아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인상과 생각을 노래한 작품으로,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에 비유하여 일제 강점기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 즉 암울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 2020. 7. 29.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艱辛)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東京) 교외(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수록 ◎시어 풀이 *플랫폼(platform) .. 2020. 7. 28. 눈 감고 간다 / 윤동주 눈 감고 간다 -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시어 풀이 *와짝 : 1. 한꺼번에 나아가거나 또는 갑자기 늘거나 주는 모양. 2. 기운이나 기세가 갑자기 커지는 모양. 3. 여럿이 달라붙어 일 따위를 단숨에 해치우는 모양. ▲이해와 감상 어둡고 힘겨운 현실 속에서 소망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가지 말고, 부정적 현실을 견디며 밝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며 각성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는 직접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아이들에게 부정적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역설적 표현과 명령형 종결어미를 사.. 2020. 7. 28.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시대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을 상징적 시어와 반어적 표현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적 화자가 자신이 처한 괴로움의 이유를 찾으려고 고뇌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1~2연에서 화자는 바람을 맞으며 까닭 모를 괴로움에 사로잡혀 괴.. 2020. 7. 28. 슬픈 족속(族屬) / 윤동주 슬픈 족속(族屬) -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시어 풀이 *족속(族屬) : ① 같은 문중의 겨레붙이. 족당(族黨). ② 같은 패거리에 속하는 사람들을 낮잡아 일컫는 말. *질끈 : 단단히 졸라매거나 바싹 동이는 모양. *동이다 : 끈·실 등으로 감거나 둘러 묶다. ▲이해와 감상 윤동주의 시 은 서정성이 넘치는 윤동주의 다른 시와는 달리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2연 4행의 간결함과 절제된 어조 속에 도리어 의젓한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목의 은 고난과 슬픔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가 쓰인 배경으로 볼 때,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당시 민족 시인이었음을.. 2020. 7. 27. 새로운 길 / 윤동주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이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년 작품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길'은 인생을 상징한다. 이 시는 인생을 상징하는 '길'을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되는데, 화자는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언제나 가야 할 길을 '새로운 길'이라고 말하며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보여 준다. 화자인 ‘나’는 어제, 오늘, 내일도 쉬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의 길’이란 이상향을 향해 가는 ‘새로운 길’을 말한다. 화자는 ‘새로운 길’을 가는.. 2020. 7. 27. 길 / 윤동주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모든 것이 황폐된 식민지 조선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아픔, 상실과 모색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참모습을.. 2020. 7. 26. 간(肝) / 윤동주 간(肝) -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1941년 작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수록 ▲시어 풀이 *둘러리 : ‘둘레’의 방언 *여위다 : 몸의 살이 빠져 마르고 파리하게 되다. *침전(沈澱) : 액체 속의 물질이 밑바닥에 가라앉음. 또는 그 물질. ▲작품 이해를 위한 참고사항 *구토지설(龜兎之說) : 삼국.. 2020. 7. 26.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둣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출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수록 ◎시어 풀이 *구리거울 : 패망한 조선 왕조의 유물. *왕조(王朝) : 같은 왕가에 속하는 통치자의 계열, 또는 그 왕가가 다스리는 시대. *참회(懺.. 2020. 7. 25. 서시(序詩) / 윤동주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적절한 상징과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고뇌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서시’는 시집의 첫 장을 장식하는 첫 번째 시라는 의미이다. 이 시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의 첫머리에 붙여진 작품으로, ‘서시(序詩)’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집 전체의 내용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2020. 7. 25. 자동문 앞에서 / 유하 자동문 앞에서 - 유하 이제 어디를 가나 아리바바의 참깨* 주문 없이도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 세상이다. 언제나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어디선가 전자 감응 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 순간, 스르르 문이 열리고 스르르 우리들은 들어간다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들어가고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나오고 그때마다 우리의 손은 조금씩 퇴화*하여 간다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만 봐야 하는 날개 없는 키위새* 머지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 - 시집 《무림일기》(1989) 수록 ◎시어 풀이 *아리바바의 참깨 : '열려라 참깨'는 천일야화 중 이야기에 나오는 주문인 ‘열려라 참깨!’를 인용한 말.. 2020. 7. 24.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 유하 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돌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벼 있는 물음 한 마디 - 시집 《무림일기》(1989) ◎시어 풀이 *연체동물(軟體動物) : 뼈가 없고 부드러우며 근육이 풍부함. 모두 유성(有性) 생식이고 대부분이 물에서 사는 동물임(문어·조개 따위)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화자는 ‘죽도’에서 할머니가 ‘오징어’ 회를 능숙하게 써는 모습을.. 2020. 7. 24. 거제도(巨濟島) 둔덕골 / 유치환 거제도(巨濟島) 둔덕골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造藥)*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 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七寸)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 2020. 7. 23. 채전(菜田) / 유치환 채전(菜田) - 유치환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수염을 드리운 몇 그루 옥수수에 가지, 고추, 오이, 토란, 그리고 울타리엔 덤불*을 이룬 넌출* 사이로 반질반질 윤기 도는 크고 작은 박이며 호박들!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은 제각기 타고난 바탕과 생김새로 주어서 아낌없고 받아서 아쉼 없는 황금의 햇빛 속에 일심으로 자라고 영글기에 숨소리도 들릴세라 적적히* 여념* 없나니. 과분하지* 말라 의혹하지 말라 주어진 대로를 정성껏 충만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족할 줄을 알라 오직 여기에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에 있거니.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나비가 심방(尋訪)* 오고 풍덩이가 찾아오고 잠자리가 왔다 가고 바람결에 스쳐 가고 그늘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햇볕이 다시 나고…… 이같이 많은 손님들의 .. 2020. 7. 23.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 2020. 7. 22. 키 / 유안진 키 - 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쟁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시집 《영원한 느낌표》(1987)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다른 이들의 삶의 모습까지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서러움에 대해 진정한 공감과 연민의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 2020. 7. 22. 성탄제 / 오장환 성탄제 - 오장환 산 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듯한 핏방울…… . - 《조선일보》(1939.10.24.) 게재.. 2020. 7. 21. 고향 앞에서 / 오장환 고향 앞에서 -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잰내비*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인문평론》(1940) 수록 ◎시어 풀이 *울멍울멍 : 울음이 터질 듯한 모양. *잰내비 : ‘잔나비’의 방언. 원숭이 *예제 : 여기저기 *장꾼 : 장(場).. 2020. 7. 21. ㅁ놀이 / 오은 ㅁ놀이 - 오은 오늘도 너는 말놀이를 한다. 재잘재잘. 도중에 말이 막히면 물을 먹는다. 벌컥벌컥. 그리고 너는 물놀이를 한다. 첨벙첨벙. 도중에 배가 고프면 너는 미음을 먹는다. 허겁지겁. 그리고 너는 맛놀이를 한다. 우적우적. 도중에 배가 부르면 너는 몸놀이를 한다. 폴짝폴짝. 그리고 너는 망놀이*를 한다. 호시탐탐.* 도중에 도둑을 잡으면 너는 멋놀이*를 한다. 찰랑찰랑. 그리고 너는 무(無)놀이*를 한다. 놀이를 안 하는 게 지루해지면 너는 문놀이를 한다. 찰칵찰칵. 도중에 잠이 오면 너는 몽(夢)놀이*를 한다. 꿈틀꿈틀. 그리고 꿈에서 너는 말놀이*를 한다. 딸깍딸깍. 말을 타는 도중에 멀미를 하면 너는 맥놀이를 한다. 두근두근. 그리고 너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멱놀이를 한다. 어푸어푸... 2020. 7. 20. 자화상 2 / 오세영 자화상 2 - 오세영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 시집 《문 열어라 하늘아》(2006) 수록 ◎시어 풀이 *형형(炯炯)한 : 반짝반짝 빛나서 밝은. *낱알 : 곡식 따위의 하나하나 따로따로의 알. ▲이해와 감상 ‘자.. 2020. 7. 19. 그릇 1 / 오세영 그릇 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시집 《모순의 흙》1985) 수록 ◎시어 풀이 *절제(節制) :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 *균형(均衡)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름. *모 : ① 물건이 거죽으로 쑥 나온 끝. ② 선과 선의 끝이 만난 곳. ③ 면과 면이 만난 부분. 모서리. ④ 공간의 구석이나 모퉁이. *맹목(盲目) : ① 먼눈. ② 사리에 어두운 눈. *사금파리 : 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 2020. 7. 18. 등산(登山) / 오세영 등산(登山) -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절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바람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 시집《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 수록 ◎시어 풀이 *자일(독 Seil) : 등산용의 밧줄. 로프 *무명(無明) :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 2020. 7. 18. 열매 / 오세영 열매 -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시집 《어리석은 헤겔》(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원(圓)의 이미지를 지닌 ‘열매’를 통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발견하고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즉 화자는 둥근 열매를 바라보며, 성숙해진 세상의 모든 열매가 둥글다는 것을.. 2020. 7. 17. 사이버 공간 / 오세영 사이버 공간 - 오세영 마지막으로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주소에 엔터 키를 치면 모니터*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공간 그 공간에도 비가 오는지 빗속의 너는 자꾸 멀리 달아나는데 가냘픈 코드를 붙잡고 덧없는 서핑*을 반복한다 세상은 거대한 와이드 웹*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씌우며 인연을 확인한다 오늘의 검색 항목은 ‘사랑’ 자꾸만 자꾸만 달아나는 너를 좇아 윈도우를 열어보지만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너의 빈 사이버 공간* - 시집 《봄은 전쟁처럼》(2004) 수록 ◎시어 풀이 *패스워드(password) : 특정한 시스템에 로그인(login)을 할 때, 사용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입력하는 문자열. 암호. *모니터(monitor) : 텔레비전 따위의 화면. 중앙 처리 장치로 제어.. 2020. 7. 16. 딸에게 / 오세영 딸에게 - 오세영 가을바람 불어 허공의 빈 나뭇가지처럼 아빠는 울고 있다만 딸아 너는 무심히 예복을 고르고만 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붙들지 못해서 우는가 보다. 강변의 갈대는 흐르는 물을, 언덕의 풀잎은 스치는 바람을 붙들지 못해 우는 것, 그러나 뿌리침이 없었다면 그들 또한 어찌 바다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붙들려 매어 있는 것치고 썩지 않은 것이란 없단다 안간힘 써 뽑히지 않은 무는 제자리에서 썩지만 스스로 뿌리치고 땅에 떨어지는 열매는 언 땅에서도 새싹을 틔우지 않더냐 막막한 지상으로 홀로 너를 보내는 날, 아빠는 문득 뒤꼍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사과 하나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 시집 《시간의 쪽배》(200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허탈한 마음과.. 2020. 7. 15. 이전 1 2 3 4 5 6 7 8 ··· 2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