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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그릇 1 / 오세영

by 혜강(惠江) 2020. 7. 18.

 

 

그릇 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시집 《모순의 흙》1985) 수록

 

◎시어 풀이

*절제(節制) :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

*균형(均衡)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름.

*모 : ① 물건이 거죽으로 쑥 나온 끝. ② 선과 선의 끝이 만난 곳. ③ 면과 면이 만난 부분. 모서리. ④ 공간의 구석이나 모퉁이.

*맹목(盲目) : ① 먼눈. ② 사리에 어두운 눈.

*사금파리 : 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오세영 시인의 시집 《모순의 흙》(1985)에 수록된 <그릇> 연작시(20편)의 한편으로, ‘그릇’이 깨어져 칼날이 된다는 것을 예로 들어 고도의 상징을 통해 절제와 균형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는 우리가 필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릇’이 팽팽하고 긴장된 힘으로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 한 '그릇'이 '빗나간 힘'에 의해 '깨진 그릇'이 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것이나 베어 넘길 수 있는 무서운 '사금파리'의 '칼날'이 되어 그 내부에 감추고 있던 긴장된 힘의 본질인 날카로운 면이 드러나게 됨을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모든 ‘그릇’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그 온전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언제나 깨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깨지지 않은 그릇, 곧 온전한 그릇은 절제와 균형이 잡힌 합리적인 세계이므로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것이 깨어졌을 때는 절제와 균형이 무너져 비합리적인 세계가 되므로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게 된다. 여기서 '칼날'은 정상적인 속성을 잃어버린 후 나타나는 비뚤어진 본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2연에서 화자는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이 가해지면,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라고 한다. '그릇'은 조화롭고 질서 잡힌 '원'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매우 불안하고 긴장된 형태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릇’에 강한 마찰력이 주어질 때 깨지게 되는데 그 힘이란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이 주어질 때이다. 이렇게 되면 ‘그릇’은 정상적인 속성을 잃어버리고 비뚤어진 본질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이성’은 ‘칼날’과 같은 위험을 상징한다.

 

  그리고 3연에서,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라고, 깨진 그릇, 곧 칼날은 사람들로 하여금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가 되어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한다고 진술한다. 아무것도 방어할 수 없는 ‘맨발’인 인간은 이 압력 하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는, 다만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요된 삶을 살아가는 아픈 상처 속에서 사람들은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에서 보듯, 자신들 역시 성숙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에 ‘그릇’을 깨려는 세력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우리 삶 속에서 조화롭고 안정된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절제와 균형을 잃어버리고 깨어졌을 때 그것의 비뚤어진 본질, 즉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으며, 또한 모나지 않는 삶에 대한 진리와 합리적인 생활에 대한 추구라는 평범한 진리 또한 일러주고 있다.

 

 

▲작자 오세영(吳世榮, 1942 ~ )

 

  시인.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잠 깨는 추상>으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다가 동양 사상, 즉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여 현대 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하였다. 이후에는 절제와 균형이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시간의 쪽배》(2005) 등이 있다.  이 밖에 평론집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1981) 《20세기 한국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의 해방》(1988) 《상상력과 논리》(1991) 《문학연구방법론》(1993) 등이 있고, 산문집 《꽃잎우표》(2000)와 시론집 《시의 길 시인의 길》(2002)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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