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시집 《어리석은 헤겔》(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원(圓)의 이미지를 지닌 ‘열매’를 통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발견하고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즉 화자는 둥근 열매를 바라보며, 성숙해진 세상의 모든 열매가 둥글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내주면서도 결코 모나지 않는 열매의 생명력을 통해 희생과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열매를 통한 삶의 깨달음을 드러내는데, 원과 직선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도치법을 사용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뒤,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에 대한 관찰을 시작한다. 직선의 이미지를 지닌 ‘가시나무’, ‘뿌리’ 등에 대비하여 열매인 ‘탱자’는 ‘둥글다’고 한다. 여기서 ‘가시나무’는 날카로운 직선의 공격적인 이미지이며, 반면 열매인 ‘탕자’는 원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다. 이어 ‘뿌리’는 날카롭고,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며, 새 생명을 위한 씨앗이 되는 존재, 즉 자기희생의 모습을 지닌 ‘열매’는 ‘모’가 나지 않고 둥근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2연에서 화자는 한 알의 ‘능금’인 열매를 예를 들어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이빨’과 ‘능금’은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로 ‘열매’의 자기희생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이빨’은 열매에 대한 공격과 파괴, 수탈을 의미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이타적인 자기희생의 이미지로서 화자는 그런 열매가 부드럽다며 열매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3연에서 화자는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고 둥글듯이,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아느냐‘고 도치법과 설의법을 사용하여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깨달음을 통해 자기 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작자 오세영(吳世榮, 1942 ~ )
시인.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잠 깨는 추상>으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다가 동양 사상, 즉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여 현대 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하였다. 이후에는 절제와 균형이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시간의 쪽배》(2005), 《문 열어라 하늘아》(2006), 《가을 빗소리》(201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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