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矛盾)의 흙
- 오세영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矛盾)의 그릇
- 시집 《모순의 흙》(1985)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실생활의 도구인 ‘그릇’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시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흙과 그릇의 순환을 인간의 삶과 죽음의 순환으로 보며,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 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감으로써 생을 완성하듯 자신도 완성된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릇'이 모든 형식과 틀을 무화(無化)시키고 절대 파멸과 완성의 경지인 '흙'에 도달하듯이, 유한성을 극복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삶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유추적 사고를 바탕으로 시상을 전개하며, 수미상관의 기법을 활용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릇은 인간의 모양이다. 흙으로 구워진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들은 곧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삶을 버린다면 인간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그릇에서 모순의 흙,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깨닫고 있다.
시인은 1연에서,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그릇’은 흙으로 빚어져 언젠가는 깨어지는 대상이다.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덩어리,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화자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모순되는 진술로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라는 말로 죽음의 필연성을 보여 준다. 삶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며 결코 어느 한 상태에 고정되거나 머무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화자의 이러한 발상의 밑바탕에는 불교적인 연기설(緣起說) 혹은 윤회설이 깔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연은 ‘그릇’의 깨어짐을 통하여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을 드러내고 있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에서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은 절정의 순간, 그릇의 완성을 의미하며, ‘순간’은 삶의 일화성을, ‘바싹 깨지는 그릇’은 그릇의 한계성, 즉 인간의 죽음을 빗댄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인생은 한 번/ 죽는다’라는 말을 덧붙여, 사람은 죽음에 의하여 자기완성에 대한 열망을 지닐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죽음을 수용하면서 어떻게든 완성된 삶을 이루어 보려는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3연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 인간은 성숙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을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으로 표현하여 성장을 위한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드러낸 뒤,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고 하여, 인간은 ‘흙’처럼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거쳐 성숙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4연에서는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絶對)의 파멸(破滅)이 있다면/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고 도치법에 의히여 강조하고 있다. 화자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릇이 깨지는 것을 완성으로 보고 있다. 이를 인간의 삶에 빗대어서 영광스러운 순간에 맞이하는 죽음을 생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깨어져서 완성되는’이라는 표현은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여기서 ‘깨어짐’이 곧 ‘완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언젠가는 깨어져 흙이 될 ‘하나의 접시’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릇의 깨어짐에서 본 삶과 죽음에 대해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수미상관으로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矛盾)의 그릇’이라는 표현으로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흙으로 그냥 있어도 흙인데 굳이 물, 불과 결합하여 단단한 그릇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깨어져 다시 흙이 된다는 것, 결국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을 흙이 되기 위해 그릇으로 변한 그릇 - 이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
‘그릇’은 누군가 사용하다가 깨뜨릴 것이며,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생애를 살다가 죽어가게 마련이다. 이것은 모두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로서 자연의 섭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에 그것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릇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깨져야 하는 시간이 오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결국 이 시인의 사생관이다.
오세영 시인은 시집 《모순의 흙》(1985)에 <그릇> 연작시(20편)를 수록하고 있다. 이들 연작시에서 그릇은 인간의 모습에 해당한다. 흙으로 구워진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들은 곧 다양한 삶을 사는 인간의 모습이다. 나아가 시인은 그릇에서 ‘채움’과 ‘비움’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공(空)'과 '색(色)'의 불교적 인식론으로 심화시킨다. 시인은 그릇에 대한 사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인이다.
▲작자 오세영(吳世榮, 1942 ~ )
시인.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잠 깨는 추상>으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다가 동양 사상, 즉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여 현대 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하였다. 이후에는 절제와 균형이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시간의 쪽배》(2005) 등이 있다. 이 밖에 평론집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1981) 《20세기 한국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의 해방》(1988) 《상상력과 논리》(1991) 《문학연구방법론》(1993) 등이 있고, 산문집 《꽃잎우표》(2000)와 시론집 《시의 길 시인의 길》(2002)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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