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멈추어 서 버린 그곳 – 하관*
- 오남구
차마 헤어질 수가 없다.
눈길 꽃상여를 따라가다 따라가다
멈추어 서버린
그곳, - 싸르륵
첫 흙을 던지는 캄캄한 일순*
벽이 보인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냉정한
벽, - 싸르륵! 싸륵! 싸륵!
덮는 핏빛 흙
덮는 눈발
삭풍* 소리 억새 갈잎* 소리 소리란 소리
세상의 차가운 것들
덮어서 쌓여서 솟은
이쁘게 만들어서 더 슬픈 봉분*
새삼 보는 벽이다! 벽
더는 따라갈 수가 없고
멈추어 서버린 그곳 - 싸륵! 싸륵!
간 발자국을 되밟아서 오는 우리
흰옷 머리 숙여 눈 쌓이고
말들 잃은 채
눈 위에 그린 한 폭 수묵화*다
- 시집 《딸아 시를 말하자》(2000) 수록
◎시어 풀이
*하관(下棺) : 시체를 묻을 때 관을 무덤의 구덩이 안에 내림.
*일순(一瞬) : 아주 짧은 동안. 삽시간.
*삭풍(朔風) : 겨울철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갈잎 : ① ‘가랑잎’의 준말. ② ‘떡갈잎’의 준말. ③ ‘갈댓잎’의 준말.
*봉분(封墳) : 흙을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쌓아 올린 부분.
*수묵화(水墨畫) : 채색을 쓰지 않고, 수묵으로 짙고 옅은 효과를 내어 그린 그림. 먹그림. 묵화.
▲이해와 감상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머니의 잃은 슬픔을 ‘하관’을 통하여 슬퍼하고 절망하면서도 아름다운 ‘한 폭 수묵화’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청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고, 유사한 구조의 반복과 변조를 통해 리듬감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주제는 모친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시어는 ‘벽’으로, 이는 화자가 느끼는 단절감을 의미한다. 물리적으로는 무덤 안에 안장된 어머니와 화자와의 거리이고, 심리적으로는 생사의 이별 앞에서 나뉘게 된 처지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는 4연 21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사색적이며 추모적인 성격을 띠며 담담하게 슬픔을 드러내는 화자의 어조가 인상적이다. 상여를 따라가다 하관을 하고 돌아서는 장례식의 과정에 따라 형상화되고 있는데, 이 시의 화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마 헤어질 수가 없다’라고 한다. 어느 자식인들 부모와 헤어진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라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인간관계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랴. 아무리 슬프고 절망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붙잡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어머니의 꽃상여를 따라가던 날, 하늘에선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어머니가 마지막 떠나가는 길, 꽃상여를 부여잡고 따라가는 길엔 눈이 하얗게 내려 모든 사물의 경계가 지워져 버린, 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조차 희미해져 버린 그 길이 끝나고 멈추어 선 곳,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단절의 공간인 ‘그곳’은 어머니의 관이 놓인 공간이며, 남은 자녀들이 어머니와 이별하는 공간이다. 이윽고 관이 내려지고 괸 위로 흙이 뿌려지는 순간 화자는 그 공간을 ‘벽’으로 인식한다. 그 ‘벽’은 ‘이승과 저승’을 단절하는 ‘냉정한/ 벽’이다. ‘싸르륵! 싸르륵! 싸륵!’ 이 소리는 어머니의 관 위로 흙이 뿌려지는 소리지만, 눈발과 눈물과 슬픔이 함께 떨어진다. 여기서 화자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심상, 즉 ‘싸르륵’이라는 심상을 제시하여 청각적인 이미지로 화자의 슬픔을 드러낸다.
이제 관이 흙으로 덮인다. ‘덮는 핏빛 흙/ 덮는 눈발/ 삭풍 소리 억새갈잎 소리 소리란 소리/ 세상의 차가운 것들/ 덮여서 쌓여서 솟은/ 이쁘게 만들어서 더 슬픈 봉분’이라고 시각적, 청각적 심상을 이용하여 관이 묻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봉분을 ‘덮는 핏빛 흙’이라고 하여, 생명의 피가 흙에 덮이는 것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차갑고 냉정한 눈발과 세상의 소리란 소리, 즉 자연의 모든 소리를 포함하여 남은 자의 눈물과 통곡까지도 덮여 쌓여서 솟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봉분은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며, 단절이며, ‘더는 따라갈 수 없는 ’벽‘인 것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어머니와의 거리감을 실감하면서 간절한 그리움을 안고 봉분을 멀리한 채 왔던 길을 되밟아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가족들의 머리 위에 ‘흰 눈’처럼 눈이 내려 쌓인다. 화자에게는 온 세상이 슬픔의 눈으로 덮인 길을 ‘말을 잃은 채’ 걸어오는 모습이 ‘눈 위에 그린 한 폭의 수묵화’로 보인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슬픔까지도 흰색으로 탈색된 때문일까. 화자는 마지막의 ‘눈 위에 그린 한 폭의 수묵화’라는 표현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한 폭의 수묵화’로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작자 오남구(吳南球, 1946~2010)
시인. 본명 오진현. 전라북도 부안 출생. 1975년 《시문학》에서 <입술 푸른 뻐꾸기>, <푸른 밀밭>, <미로>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동진강의 바람과 물과 흙이 키워낸 시인’이라고 평을 받고 있으며, 21세기 한국 현대시에서 ‘시의 예술성’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 《동진강월령(東津江月令)》(1975), 《민초(草民》(1981), 《탈관념(脫觀念)》(1988), 《딸아 시를 말하자》(2000), 《첫 나비,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2001년), 《빈자리x》(2008) 《노자의 벌레》(2010)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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