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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꽃의 페러디 / 오규원

by 혜강(惠江) 2020. 7. 10.

 

 

 

꽃의 페러디*

 

-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개밥 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 명사나 수 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수록

 

 

◎시어 풀이

*패러디(parody) :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

*왜곡(歪曲) :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함.

*명명(命名) : 사람, 사물, 사건 등의 대상에 이름을 지어 붙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시이다. ‘패러디’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하는데,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작품을 패러디하여 사물 인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대상에 이름을 순간 존재는 왜곡(歪曲)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시어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왜곡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시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원작에 나타난 대상 인식 방법인 ‘명명(命名) 행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원래 ‘명명 행위’란 이름을 갖지 않은 존재에게 그 대상의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언어로 치환(置換 ; 바꾸어 놓음)하는 행위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의 모습 대신 이름으로써 그 대상을 떠올린다. 그런데 언어는 대상의 본질이나 의미를 완벽하게 재현해 내지 못한다. 언어 자체가 사물의 본질이나 순수성을 정확하게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지 그 언어 체계 안에서 의미의 틀을 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대상의 본질은 사라지고 그 대상이 ‘언어’라는 의미의 틀 안에서 갖는 이름만이 남을 뿐이다.

 

  김춘수의 <꽃>에서의 명명(命名) 행위는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는 행위로서, 이를 통해 대상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명명 행위는 대상의 이름을 부르면 그 대상의 본질이 왜곡되고 명명자가 만든 의미의 틀에 갇혀 버림을 드러내고 있다.

 

  김춘수의 <꽃>의 구성 방식을 따라서 유사한 방법을 반복하여 의미를 나차내는 이 시는, 1연에서 화자는 존재의 본질이 왜곡되기 전의 상태를 드러내고, 2연에 와서 명명 행위에 의해 왜곡된 대상을 본질을 그려낸다. 그래서 화자는 3연에서 명명 행위에 의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의미의 틀에 갇힌 대상을 열거한 뒤, 4~5연에서 명명 행위를 하고자 하는 ‘우리들’에 의해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왜곡의 순간을 기다리는 존재들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화자는 이 시를 통해 대상의 본질 인식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대상에게 자기 마음대로 명명을 하는 것은 곧 대상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자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경남 밀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우계의 시>, <몇 개의 현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로 시의 언어와 구조를 탐구하거나 물질문명과 정치화되어 가는 현대 언어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이 땅에 씌여지는 서정시》(1981), 《마음의 감옥》(1991),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사랑의 감옥》(2001),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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